[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傅弘之[br]부홍지}}}''' || || '''성''' ||부(傅) || || '''이름''' ||홍지(弘之) || || '''자''' ||중도(仲度) || || '''출신''' ||북지군(北地郡) 이양현(泥陽縣) || || '''생몰''' ||377년 ~ 418년 || || '''부친''' ||부소(傅韶)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의 장수로 자는 중도(仲度). == 생애 == [[부지]]의 현손이며, 부소의 아들로 377년에 태어났다. 주의 주부로 임명되고 수재로 천거되었으나 천거에 응하지 않았다. [[환현]]의 찬탈에 반발하여 신야 사람인 유측(庾仄)이 남양에서 거병하고 옹주 자사 풍해(馮該)를 습격하여 패주시켰다. 당시 강릉(江陵)에 있었던 부홍지는 유측의 조카인 유빈(庾彬)과 함께 형주 자사 [[환석강]]을 죽여서 유측에게 호응하려고 했으나 유빈의 사촌동생인 유굉(庾宏)이 이 계획을 알고 환석강에게 밀고하였다. 이로 인해 유빈은 살해되었고 부홍지는 수감되었지만, 환현은 부홍지가 주모자가 아니고 관직이 없는데다 군대를 이끌지 않았기에 부홍지를 용서하고 불문에 부쳤다. 유유가 거병하자, 부홍지는 보국장군 유도규 밑에서 참군, 영원장군, 위흥군 태수가 되었다. 410년, [[노순]]이 반란을 일으키자, [[환석수]]와 왕천은(王天恩)이 노순에 호응하였다. 당시 양주(梁州) 자사로 있었던 부홍지의 부친 부소는 부홍지를 파견하여 환석수와 왕천은을 토벌하고 모두 참수하였으며, 부홍지는 태위 행참군으로 제수되었다. 뒤에 부홍지는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종군하였고 건위장군(建威將軍), 순양군(順陽郡) 태수가 되었다. 유유가 북벌을 개시할 때, 부홍지는 무관(武關)에서 입성하여 상락군 태수를 패배시키고 방빈지(龐斌之), 대양(戴養), 강횡(康橫) 등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이후 계양공 [[유의진]]의 옹주 치중종사사로 진위되었고 서융사마, 영삭장군이 되었다. 이때 약양군 태수 서사고(徐師高)가 배반하자, 부홍지는 이를 토벌하였다. 유유가 동진 조정으로 돌아간 뒤 [[혁련발발]]의 태자인 [[혁련괴]]가 장안을 습격하자, 부홍지는 지양(池陽)에서 혁련괴의 침공을 물리쳤다. 혁련괴가 위남(渭南)으로 2차 침공을 감행하자, 부홍지는 과부인도(寡婦人渡)에서 다시 혁련괴의 침공을 물리쳤다. 유의진이 조정으로 귀환할 때, 혁련발발은 북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배후를 추격했고 청니(靑泥)에서 전투를 벌였다. 부홍지는 이때 패배하여 사로잡혔으며, 혁련발발이 부홍지에게 항복을 압박했으나 부홍지는 굴하지 않았다. 당시 날씨가 추웠는데, 혁련발발은 부홍지의 옷을 벗기도록 명하였고, 부홍지는 혁련발발을 비난하다가 결국 살해되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77년 출생]][[분류:41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