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씨''' || [[부여(성씨)|부여]] || || '''이름''' || 자신 (自信), 자진 (自進) || || '''관직''' || 달솔 → [[좌평]][*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좌평을 자칭했거나, 백제부흥군 내에서 좌평으로 임명되었던 걸로 추정된다.][br]대금하 (大錦下)[* 671년 일본 조정에서 하사받은 관직.] || || '''생몰년도''' || 미상 || || '''국적''' || [[백제]] → [[일본]] || [목차] == 개요 == [[백제]]의 왕족[*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간무 덴노]]의 생모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조상인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추정된다.]이자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유민. 기록상으로는 성씨를 '여씨'로 축약 표기한 '여자신(余自信)' 또는 '여자진(餘自進)'으로 기록되어 있다. [[귀실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인사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생애 == 660년,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당시 관등은 달솔이었다. 백제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혹은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각각 [[웅진성]], [[주류성]]으로 비정된다. 다만 백제부흥군이 [[웅진성]], [[사비성]] 탈환에 실패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웅진성 ''''부근''''에서 활동했다고 봐야할 듯.]에서 거병했다. 백제의 패잔병들을 규합하고, 신라군을 격파하여 백제 사람들은 그를 귀실복신과 함께 '좌평(佐平)'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패퇴하자, 동년 9월 24일에 부여자신은 일본 수군과 함께 탈출해 궁례성[* 지명 미상. 다만 여기서 출발해 일본으로 망명한 점을 미뤄보면 백제 서남해안 지역 중 어딘가로 추정된다.]에 이르렀다. 이후 다음날인 9월 25일에 출발하여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과 함께 일본 열도로 망명했다. 669년, 부여자신은 귀실집사 등 백제 유민 700명과 함께 일본 칸자키군(神崎郡)의 서남쪽에 옮겨 살게 되었다. 671년 정월, 사택소명과 함께 종4위 대금하(大錦下)의 관직을 제수받고 법관대보로 임명되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타카노노 미야츠코(高野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右京 諸蕃 百濟 高野 造 百濟國人佐平'''余自信'''之後也. 타카노노 니이가사와 '우지(氏)'는 '타카노(高野)'로 같은데 '카바네(姓)'가 '미야츠코(造)'로 다르다. 니이가사 가문의 경우 카바네가 '아손(朝臣)'이었다.] == 기타 == 백제부흥운동 초반부터 거병했고, 좌평직을 맡을 정도로 고위직이긴 했지만 [[귀실복신]], [[도침]], [[부여풍]], [[흑치상지]]보다 기록이 한참 부족한 인물이다. 백제 부여씨 왕족 출신이나 그가 활동했던 시기인 [[의자왕]], 부여풍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왕족이었음에도 일본에 있는 부여풍을 부흥군이 국왕으로 추대한 정황으로 미뤄보면, 직계 왕족이 아닌 방계 왕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난 이후에도 그가 아닌 [[부여선광]]에게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즉 백제의 왕([[건길지]])이란 성을 내렸다는 일본 측 기록을 보면 부여자신은 의자왕 직계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특히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게 맞다면 31대 의자왕 대에는 당연히 이미 방계 중의 방계였다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여자진(부여자신)을 [[도침]]으로 비정하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도침은 명백히 귀실복신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부여자신은 백제부흥운동 이후에도 살아남아 [[일본]]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으므로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분류:백제의 왕족]][[분류:백제계 도래인]][[분류:몰년 미상]] [include(틀:포크됨2, title=부여자신, d=2022-07-11 18:2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