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파일:이란 국기.svg|height=15]] {{{#white '''[[이란|{{{#white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br]{{{+1 بوشهر}}}'''[br]부셰르 | Bushehr}}} || ||<-3> [include(틀:지도,장소=Bushehr,너비=100%,높이=200px)] || ||<-2> '''{{{#white 지역}}}''' || 부셰르주 || ||<-2> '''{{{#white 면적}}}''' || 64km² || ||<-2> '''{{{#white 인구}}}''' || 323,504명 (2016년) || ||<-2> '''{{{#white 도시권 인구}}}''' || 398,581명 (2016년) || ||<-2> '''{{{#white 인구밀도}}}''' || 5,055명/km² || [[파일:부셰르 이란.jpg|width=550]] 부셰르 구도심 [clearfix] == 개요 == [[로마자]]: Bushehr [[페르시아어]]: {{{+1 بوشهر }}} [[이란]] 서남부 부셰르 주의 [[주도]]. [[쉬라즈]]에서 서남쪽으로 150km 떨어진 [[항구 도시]]이다. [[인구]]는 약 40만명이다. [[호르무즈 섬]], [[반다르아바스]] 등과 함께 과거 [[이란]]의 주요 교역항 중 하나였다. 구도심에는 옛 건물들이 다수 남아있고, 남쪽에는 신시가지가 있는데 둘 사이에 부셰르 [[공항]]이 위치한다. --접근성 + 소음-- 부셰르는 열화학 발전소를 중심으로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외에도 철강업, 직물업, 어업 등이 발달하였다. [[근대]]에 [[영국]] 등 [[서구권]] 열강들과 활발히 교류한 덕에 부셰르는 이란 [[근대화]]의 선두 주자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이란의 첫번째 근대식 인쇄소가 세워져 이란 최초의 [[잡지]]가 유통되었고, [[전기]] 역시 매우 일찍부터 도입되었다. 이란의 첫 유선 통신 역시 부셰르에서 인도와 유럽으로 이어졌다. 한편 부셰르에서 동남쪽으로 170km 떨어진 [[항구]] 반다르 시라프에는 지진으로 수몰된 [[고대]] 도시 시라프가 있는데, 해저 [[고고학]]의 대상지 중 하나이다. 서북쪽으로 50km 떨어진 항구 반다르 리그는 현재까지도 [[아랍인]]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문화]]와 [[건물]]로 유명하다. == 역사 == [[엘람]] 시기부터 항구가 있었다. [[헬레니즘]] 시기 [[셀레우코스 왕조]] 하에서 페르시아의 안티오키아 (Ἀντιόχεια τῆς Περσίδος)로 불렸고, [[안티오코스 3세]]가 동방 원정 후에 머물기도 하였다. 기원전 170년에 [[파르티아]]령이 되었고, 그후 [[사산 제국]] 시기에 창건자 [[아르다시르 1세]]의 이름을 따서 부크트 아르다시르라 명명되었다. 부크트 아르다시르는 사산 제국의 주요 해군 기지였고, 5세기부터는 남부 이란으로 포교하려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주요 거점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부크트 아르다시르는 축약되어 현재의 부세르가 되었다. === 부셰르 토후국 === [[파일:부셰르 이란 1.jpg|width=780]] 1840년의 부셰르 삽화 한편 13-14세기 [[걸프 아랍인]]들이 바다를 건너 부셰르 ~ 반다르아바스 일대로 이주하였다. 그중 하왈라 부족은 부셰르에 정착했는데, 1747년 [[나디르샤]]가 사망한 후 혼란기를 틈타 그 족장인 셰이크 나스르 알 마드쿠르가 페르시아인 샤반다르 (총독)를 축출하고 도시를 장악하였다. 1751년 1월 그는 독립을 선포하였고 이스마일 3세가 파견한 징세관들을 감금하였다. 그해 9월 나스르는 [[바레인]]을 침공했으나 격퇴되었고, 역으로 11월에 셰이크 아살루가 이끄는 바레인 군이 부셰르를 포위하였다. 다만 후자 역시 함락에 실패하고 후퇴하자 나스르는 재차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1753년)[* 정확히 말하면 동맹인 반다르 리그의 미르 나세르에게 주었으나 반다르 가나베의 공격을 받은 후자가 결국 바레인을 넘김] 나스르는 1737년부터 부셰르에서 교역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1752년 떠나자 1763년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상관 건설 및 해군 주둔을 허가하였다. 한편 남쪽 카타르의 주바라에는 [[네즈드]] 출신 우트바 부족이 있었는데, 1782년 바레인에서 그 일원이 분쟁 끝에 살해된 것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란의 [[잔드 왕조]]는 명목상 복속해 있던 나스르를 도와 2천 병력을 파견하였고, 그들은 주바라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1783년 5월) 그후 주바라의 우트바 부족은 쿠웨이트의 친척들까지 합세하여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이때 우트바 부족은 나스르의 칼을 얻었는데, 대대로 전하다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선물로 주어 현재는 리야드의 국왕 압둘아지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바레인을 상실한 후로도 하왈라 부족은 부셰르를 다스렸는데, 영국-페르시아 전쟁 당시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1856년 12월) 그후 [[카자르 왕조]]의 지배가 회복되었고, 아랍인들은 다시 아라비아 반도로 돌아갔다. 한편 1915년 독일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군에게 재차 점령되기도 하였다. [[분류:이란의 도시]][[분류:이란의 옛 수도]][[분류:부셰르 주]][[분류:이란-바레인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