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駙馬, [[황제]]·[[왕]]의 [[사위]] == [include(틀:황실/왕실)] === 개요 === 엄밀하게는 '''[[천자]]'''의 딸과 결혼한 남자를 말한다. 즉, '''[[공주]]/[[옹주]]의 남편'''이자 '''[[임금]]의 사위'''를 말한다. === 역할과 지위 === 풀네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천자의 행차 때 갑작스런 [[암살]]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어느 마차에 천자가 탔는지 모르도록 동행하는 예비 마차인 '부거'(副車)를 끄는 말인 '부마'(駙馬)를 관리하던 직책이다. 현대 사회의 직책과 비교하자면, '대통령 경호실 2호차 관리 및 선탑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이라곤 그냥 아랫사람 시켜서 왕이 타는 마차를 관리하다가 황제의 행차가 있으면 선탑하는게 주요 임무인, 놀고먹기 딱 좋은 고대의 땡보직 중의 땡보직이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직책인 것이, "행차 때 황제가 몇번째 마차에 타고 있는가?" 라는 초특급 기밀을 관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초특급 기밀이 유출된다는 것은 황제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진나라 때 [[장자방]]과 [[창해 역사]]의 시황제 암살기도가 실패했던 것은 박랑사에서 부거를 잘못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도 위세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난세가 되면 황제의 측근이라고 매수되어 기밀을 발설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이 직책에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공주의 남편인 사위를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자의 사위만이 부마도위 직책을 하도록 굳어지면서 결국에는 '부마도위=천자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 뒤에는 그나마 맡던 역할도 희미해져서 사실상 명예직에 가깝도록 변하였다. 물론 위세는 어디 가지 않았다. 비슷한 것으로는 천자의 외숙에게 주어지던 '거기장군'(車騎將軍)이 있었다. 상위 버전으로 [[여왕]]의 남편인 '[[국서]]'가 있다. 다만 한국사의 경우 여왕이 신라시대에 세 명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독신이거나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거나 혼인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한국사에 한해서는 의미없는 용어이다. 여왕이 종종 나왔던 서양사에 관련해서 주로 쓰이는데 그나마도 여왕의 남편을 무조건 국서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여왕의 남편이라는 식으로 풀어쓰는 편이다.[* 서구권에서 국서에 해당하는 King consort 작위는 여왕과 결혼했다고 해서 무조건 주어지는 호칭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King consort라는 작위가 서임된 사례가 전무하며, King consort의 하위 단계인 Prince consort 역시 전체 칭호가 Prince consort인 인물은 [[앨버트 공]] 이외에는 없다. 스페인에서 King consort 작위를 받은 [[이사벨 2세]]의 남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는 애초에 이사벨의 친사촌으로 같은 [[보르본 왕조]] 출신이었고, 포르투갈의 경우 결혼 직후에는 Prince consort 칭호를 받고 여왕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면 공동 왕으로서 King이 되었다. 이 법 때문에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의 첫번째 남편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로 아내인 마리아보다 먼저 죽어서, 프린스 칭호의 국서에만 머물렀고 두번째 남편 [[페르난두 2세]]는 마리아와 슬하에 여러 자식을 낳으면서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한편 한 나라 안의 왕실과 일반 귀족 가문 사이나, 천자국의 왕가와 제후국의 왕가 사이처럼 명백하게 급간 차이가 나는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국가 관계에서 타국의 공주와 결혼했을 때는 부마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 '부마'라는 용어 자체가 위에서 설명된 어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서 공주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낮다 해봤자 대다수가 귀족(양반)이지만.] 신하와 결혼한 경우에 사용되는 동아시아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비슷한 급의 왕족끼리 겹겹이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 다반사인 서양 왕족의 결혼과 관련해서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 [[한국사]]에서 === [[신라]]에서는 적자가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 신라 왕위를 성씨가 다른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이다.[* 최초의 석씨 왕 [[탈해 이사금]]은 박씨인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고, 최초의 김씨 왕 [[미추 이사금]]은 석씨인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으며, 신라 후기 박씨 왕조의 시조인 [[신덕왕]]은 김씨인 [[헌강왕]]의 사위였다.][* 애당초 성골이란 개념 자체가 진평왕대에 왕위계승 정당화를 위해 성립된 개념이란 설이 통설이고, 신라의 국혼은 철저하게 족내혼이 주류였다. 즉 성씨가 다르느니 해도 기본적으로 다들 몇 겹씩 중첩된 혼인으로 맺어진 근친들이라는 것] [[국성]]이 바뀐다는 개념이라 신라 이외 중세 이후의 흔한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이기도 하다. 한편 나말 여초 후백제의 장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이자 태조 [[왕건]]의 사돈, 제3대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부마가 가장 자주 언급되는 시대는 고려시대이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였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 [[몽골인]] 왕비들 중 유일하게 황제의 친딸이었다. 나머지 몽골인 왕비들은 방계 황족이나 귀족 출신으로 [[공주]] 칭호를 받고 고려 왕에게 시집왔다.]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제1왕비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왕위도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의 입김이 강하다보니 원나라 출신인 [[왕비]]와 그 수족들의 힘도 강해서 고려인들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원나라 출신인 왕비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으며, [[노국대장공주]][*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금슬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국대장공주는 이전 원나라 공주들보다 신분이 낮았다. 그래서 이전 몽골인 왕비들보다 권세를 부릴 여지가 적었다.]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 업신여겼다.[* 다만 이때 [[몽골인]] [[왕비]]들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시집와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먼 타향까지 왔는데 남편인 왕이 자신보다 후궁들에게 애정을 더 보이면 곱게 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인격이 미성숙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왕비 입장에선 고려 왕 하나 보고 왔는데 왕은 자길 사랑하지 않으니 밉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행보를 보면 왕비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의 입장에서 탐탁치 않은 일이 많다. 폭군 [[충혜왕]]은 아예 '''자신의 서모인 [[경화공주]]를 [[강간]]했다.'''] [[조선]]의 경우에는 [[세조(조선)|세조]] 때부터 '의빈'(儀賓)이라고 하고, 의빈부(儀賓府)에서 관장했는데, [* 하지만 부마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예의를 갖춘 손님'이란 뜻으로 [[사위]]를 흔히 '[[백년손님|(백년)손님]]'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첨위로 봉했다. ○○에는 부마의 본관 내지 그곳에서 따온 칭호가 들어간다.[* 예를 들어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남편 정종의 봉호 '영양위'(寧陽尉)는 본관인 [[해주시|해주]]의 별칭인 '대령'(大寧)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적자#s-2|적녀(嫡女)]]로 무품, [[옹주]]는 왕의 [[서자|서녀(庶女)]]로 무품, [[군주(동음이의어)#s-2|군주]]는 세자의 적녀로 정2품, [[현주#s-1]]는 세자의 서녀로 정3품 작위다. 옹주의 남편인 도위나 부위, 첨위도 업적에 따라서 의빈부 최고 품계인 유록대부(정1품)에 오를 수 있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6년에 [[공주]]와 [[옹주]]의 남편인 위는 정1품으로,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남편인 부위는 종1품으로, 역시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남편인 첨위도 종1품으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01024_007|#]]) 왕의 사위인 만큼 그 대우가 각별하고 왕실에서 넉넉하게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편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처신을 잘못해서 정쟁에 휘말리거나 배짱이 두둑해져 바람을 피다가 [[군주|장인]]에게 걸려 혼쭐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조선]] 왕조의 경우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고 의전을 맡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 왕녀와 결혼했다고 자동으로 외교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외교]] 실무는 부사나 서장관 등이 맡고, 정사는 사신단의 격을 높이기 위한 [[높으신 분]]이면 된다.][*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유명한 기행문 《[[열하일기]]》는 [[영조]]의 [[3녀]]인 [[화평옹주]]의 남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청나라]]에 진하사로 갔을 때 동행하면서 집필했다. 참고로 박지원은 박명원의 8촌 동생이다.] 되는 등 실권 없는 얼굴마담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첩]]을 둘 수 없었고 아내가 죽었다고 해도 후처를 맞이하지 못하고 그대로 홀아비로 살아야 했다.[* 다만 홀아비가 되고 나서 첩을 두는 것은 왕실에서도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간혹 왕의 허락을 받아 재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숙종(조선)|숙종]] 때 [[효종(조선)|효종]]의 4녀 [[숙정공주]]가 요절한 후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 [[영의정]] [[정태화]]의 5남으로 작은아버지인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이 재혼할 것을 청한 것을 물리치면서 이를 계기로 부마의 재혼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만약 공주가 일찍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면 무조건 양자를 들여야 했다.[* 위의 정재륜도 작은아버지 정치화가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던 사람인데,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이 후사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큰형(법적으로는 사촌) 정재대의 손자인 정석오를 죽은 아들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조선 후기에 왕녀들이 단명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수절하는 부마가 늘어났다. 혼인하고 3개월만에 아내 [[영혜옹주]]가 죽어 홀아비가 된 [[박영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부마는 재혼을 못한다는 관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심지어 [[일제강점기|조선이 멸망한 뒤로도]] 후처를 들이지 못했고, 죽어서도 정실부인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다. 그나마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그를 배려하여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첩]]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어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계승할 자손은 남길 수 있었다. 그 후손들 중 한 명이 흥영군 [[이우]] 공의 부인인 [[박찬주(교육자)|박찬주]] 여사이다. [[공주]]건 [[옹주]]건 품계를 초월한 [[자가]](自家)들이라 남편과 시부모조차 며느리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 오죽하면 효도와 남존여비가 철칙인 시대인데도 [[공주]]와 [[옹주]]는 시부모에게 절을 안 해도 괜찮았으며, 아들을 못낳아도 구박할 수 없었다.][* 이건 당연한 것이 '효'나 '남존여비' 자체가 유교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그 유교 질서가 가장 따지는 것이 강상 윤리이기 때문이다. '천지군친사'라는 말대로 '군'은 '친'보다 앞이니 '군'인 공주가 '친'인 시부모에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실직을 맡을 수 없으니 출셋길도 막히고, 재수 옴 붙으면 [[정종(부마)|정종]]처럼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끔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왕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이니 원래 가문이 어쨌든 간에 순식간에 1등급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부마 본인은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부마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은 과거시험이나 조정 내 승진 등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게 되고[* 위의 정재륜 같은 경우에도 그가 부마가 된 것이 친아버지 정태화와 양아버지인 정치화가 정승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요인으로도 꼽힌다. 물론 그 윗대부터 [[정광필]], 정유길, 정창연 같이 정승을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고, 능력도 뛰어나기도 했기에 무능한 아버지를 낙하산 태워준 수준은 아니고 날개를 달아준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재륜이 아들의 양자로 들인 정석오도 정승에 오른다.], 왕녀와 부마 사이의 자손은 왕실의 외손이라는 이유로 남자는 벼슬길이, 여자는 혼삿길이[* 이 시대에 여자는 공직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탁 트이곤 했다. 예를 들어 [[정명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부마 [[홍주원]]의 후손이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다. [[수빈 박씨]]도 [[화평옹주]]의 남편인 부마 박명원의 추천으로 후궁 간택이 되었다. 자손까지 내내 벼슬할 수 없이 무위도식해야 하는 왕자들[* 왜 그런지는 [[구성군]] 문서를 보면 된다.]보다 오히려 낫다고 할수 있다. 게다가 왕의 성향이나 어느 정도로 총애받는 딸이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긴 했어도 왕녀의 [[지참금]]이란 일반 양반가 딸들과는 자릿수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왕녀들이 시집오며 가져온 재산으로 집안을 더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례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가 매우 총애하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는데, 원래도 명문가였으나 화순옹주가 시집오면서 새삼 갑부가 되어 김정희가 그토록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시 영조의 딸로 총애받던 [[화완옹주]]의 경우 남편이 딸 하나만 두고 요절하여 청상과부가 되자 남편의 사종질(四從姪, 11촌 지간)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는데 정후겸의 생부모 집안까지 살림이 확 피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왕실에서 부마로 찍으면 본인이나 그 부모가 싫다고 맘대로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방원|조선 제3대 태종]]이 [[후궁]] 소생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려고 지화라는 [[점쟁이]]를 시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봤는데, [[춘천]] [[군수]]를 지냈던 [[이속(조선)|이속]][* [[간택]] 제도가 생기게 한 장본인]은 지화를 쫒아내면서 "내 아들을 [[신빈 신씨|몸종]][[정신옹주|의 딸]]에게 장가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貞惠翁主)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라고까지 말한다. [[정신옹주]]는 [[신빈 신씨|신녕궁주(愼寧宮主) 신빈 신씨]]의 소생인데, 신녕궁주는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 민씨를 모시던 몸종이었다. 그러나 정혜옹주는 [[의빈 권씨|정의궁주(貞懿宮主) 의빈 권씨]]의 소생인데, 간택받아 [[후궁]]이 된 명문가의 규수 출신이었다. 즉 풀어쓰면 모친의 혈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망언이었다.[* 다른 왕이라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라면서 대충 귀양보내고 말았겠지만, 상대는 [[정몽주|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을 죽이고, [[정도전|조선의 설계자]]와 이복동생 [[이방번|2]][[이방석|명]]도 죽이면서 [[이성계|창업군주인 아버지]]도 사실상 쫓아내고, [[이방간|동복 형]]과 [[왕자의 난|대판 싸우고]]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이었다(...) 게다가 태종은 자식 3명을 어렸을 때 병으로 잃은지라 자식에게는 물렀다.][* 그러나 이속 본인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인 [[연안 이씨]]가 할아버지 이원발부터 고려의 전공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 태조가 몇 번이나 상신으로 초빙을 했어도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명신이었고, 아버지는 호조판서와 제조를 지낸 이귀산, 큰아버지인 이귀령은 좌의정을 지낸 명문가이니 왕실과 혼인을 할 때 하더라도 아무 왕녀나 허겁지겁 맞아들여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물론 굳이 말을 그렇게 비꼬듯이 했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으므로 이후 인생 망한 것도 본인 책임.] 결국 수 차례의 상소 러시 끝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해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로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기록조차 남지 않는 여생을 보내게 된다. 사실 이 시기에는 왕족이건 부마건 관직에 오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박종우는 [[세종대왕]] 대에는 형조판서를 지냈고, [[문종(조선)|문종]] 대에는 부친과 같이 찬성 직위까지 오른다. [[이홍위|단종]]대에는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해서 1등 공신에 오르는 등 꽤 호사를 누렸다.[* 이 때문에 [[성삼문]]의 아내와 딸을 노비로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자을산군|성종]] 대에 "서얼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하자 박종우의 처가 이를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 신료들 중에서는 "부마의 재혼은 없다. 허락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으나, 성종이 "선대에서 허락한 일"이라고 해서 정처로 인정해줬다. 예외적인 경우로 배짱이 두둑하여 아내를 폭행하거나,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거나, 홀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종과 바람이 나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는 당연히 난리가 나서 무겁게 응징당한다. 예를 들어, [[중종(조선)|중종]]은 딸인 [[효정옹주]]가 남편의 홀대를 받다가 [[요절]]하자 분노해 그 부마를 처벌하기도 했다. 중종의 딸로 [[숙원 이씨(중종)|숙원 이씨]] 소생이던 [[효정옹주]]는 남편 조의정의 바람과 무시, 학대를 당하다 난산 끝에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심지어는 난산을 겪던 딸을 위해 왕이 보낸 [[의녀]]를 조의정이 못 들어가게 대문을 안 열어줬다. 이쯤 되면 아내가 빨리 죽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덤으로 보자면 '감히' 왕이 보낸 [[의녀]]를 못 들어가게 했으니 이것 역시도 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옹주가 사망하자, 격노한 중종이 조의정을 국문에 부쳤다가 직위를 박탈하고 귀양보냈다. 이때, 조의정의 상간녀 풍가이도 같이 처벌되었다. 그녀는 원래 옹주의 몸종이었으나, 조의정이 그 미모에 반해서 강제로 첩으로 삼았다. 박색이었던 옹주를 몹시 싫어한 조의정은 정실인 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부마에게는 원칙적으로 금지된 첩으로 들이려 했다. 그래서 중종이 풍가이를 귀양보내라 명했는데, 조의정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 왕조 시대 임금을 속이는 건 '''기군망상'''이라고 해서 역모급으로 간주되었다.] 풍가이를 숨겨둔 채 계속 정을 통해왔던 것이 발각났다. 그러나 풍가이가 그의 첩이 된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풍가이가 평소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녀라는 점 때문에, 대신들이 극력 옹호한 덕분에 곤장 100대로 끝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궁 은대[* 기록에 의하면 은대는 [[숙원 이씨(중종)|숙원 이씨]]의 여동생이었다. 즉 [[효정옹주]]의 [[이모]]. 이 사람은 예전에도 효정옹주의 동복언니 [[정순옹주(중종)|정순옹주]]의 남편이 첩을 두어 서자를 만들자 그 첩실과 아이를 죽인 일이 있었다. 단순히 '조카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분노한 이모'로서 행동한 게 아니라 중종의 비호를 받던 궁중 내 해결사였다는 얘기도 있다.]가 사람을 시켜, 가뜩이나 곤장 100대를 맞아 반죽음이 된 풍가이를 구타하고 수십일 동안 방치하여 죽게 했다. 신하들은 은대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중종이 끝까지 비호하여 1년 남짓 귀양을 살고 풀려났다. 이를 볼 때 은대의 배후에 중종이 있었거나, 꼭 그러진 않았어도 딸의 불행한 결혼생활의 원인 중 하나인 풍가이를 죽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는데 은대가 그걸 이루어주었으니 잘 죽여줬다고(…) 생각해서 비호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지고 보면 풍가이도 조의정의 강요 때문에 그의 첩이 된 피해자였으나, [[만악의 근원]]인 조의정에겐 정치적인 이유+효정옹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중종의 외손자)의 안위 때문에 중종이 유배조차 1년 만에 풀어줄 정도로 약한 처벌만 내린 걸 고려해 보면 만만한 풍가이 쪽에게 [[화풀이]]를 한 걸지도. 한국사 최후의 부마는 [[영혜옹주]]와 결혼했던 [[철종(조선)|철종]]의 부마 [[박영효]]다. 마지막 왕녀는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이지만 그녀가 일본제국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한 것은 1931년으로,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였기 때문이다. === 여담 === 영어로는 단순하게 king's son-in-law(말 그대로 왕의 사위)라고도 적고, 왕자와 동일하게 prince라고 호칭하기도 하는데, 영어를 번역할 때 부마임이 분명한 캐릭터에 사용된 prince를 왕자로 직역해버리는 경우가 있어 의미가 틀어지곤 한다. 전문 번역가들이 이를 모를 확률은 낮고, 부마라는 단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다 왕자라는 단어가 아무래도 더 간지가 나니 오역인줄 알면서도 일부러 왕자라고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제일 유명한 케이스인 [[페르시아의 왕자]]의 경우,[* 시리즈 1편에서 주인공은 왕족도 아니고 약혼자도 아닌 그냥 공주의 애인이다.] 이 프랜차이즈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90년]]경 복제판 PC 게임을 통해서였고 아직 정발조차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공식 번역 명칭 따윈 없었다. 따라서 이는 번역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저 "prince=왕자"라는 상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게임 배경이 자세하게 알려진 것도 아니고 타이틀 화면만 볼 수 있었으니 어쩌겠는가.[* 당시에도 스토리 이해를 통해 왕자가 아니라 부마임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런 익숙하지 못한 단어까지 사용해야 하냐며 고지식한 사람 취급당하곤 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시리즈를 거듭하며 게임의 주인공이 부마가 아니라 진짜 왕자 출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판타지 소설에서는 보통 [[공작(작위)|공작]]의 상위 개념인 대공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 항목이 작성된 부마 목록 === ==== 실존인물 ==== * [[공민왕]]: [[원나라]] [[노국대장공주]]의 남편. * [[김용수(신라)|김용수]][* [[김용춘]]이라고도 한다.]: [[신라]] [[천명공주]]의 남편. [[진평왕]]의 부마. * --[[김품석]]--: [[신라]] [[고타소]]공주의 남편.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지만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기 전 죽어서 부마는 아님. * [[김흠운]]: 신라 [[요석공주]]의 남편. 태종 무열왕의 부마. * [[김유신]]: 신라 지소공주의 남편. 태종 무열왕의 부마. * [[도쿠가와 이에모치]]: [[닌코 덴노]]의 부마.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의 남편. * [[박영효|금릉위 박영효]]: [[조선]] [[철종(조선)|철종]]의 부마. [[영혜옹주]]의 부군. [[경술국치]] 후 [[조선귀족]]이 되어 [[후작]]이 된다. * [[석탈해]]: [[남해 차차웅]]의 부마. [[아효부인]]의 남편. * [[소배압]]: [[요나라]] [[요경종|경종]]의 차녀인 위국공주(魏國公主)[* 오국공주(吳國公主) → 위국공주] 야율장수녀(耶律長壽女)의 남편 * [[소손녕]]: [[요나라]] [[요경종|경종]]의 3녀인 조국공주(趙國公主)[* 월국공주(越國公主) → 조국공주] 야율연수녀(耶律延壽女)의 남편 * [[시소(당나라)|시소]]: [[당나라]] [[평양공주]]의 남편. * [[심문화]](沈文和, ? ~ 478년) : 남조 제나라의 초대 황제 [[소도성]](蕭道成, 427년 ~ 482년)의 부마(駙馬)로 소도성의 장녀 의흥헌공주(義興憲公主)의 남편이다. 남조 송나라 때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이르렀다. 남조 송나라의 형주자사 심유지(송나라 태위 심경지의 사촌)의 아들이다. * [[심군리]](沈君理, 525년 ~ 573년) : 남조 진나라 초대 황제 무제 [[진패선]](武帝 陳霸先)의 부마(駙馬)이자 진나라 마지막 황제 후주 [[진숙보]](後主 陳叔寶)의 국구(國舅)이다. [[심무화|후주황후 심무화]](後主皇后 沈婺華)의 아버지이며, 폐태자 오흥왕 진윤(廢太子 吳興王 陳胤)의 외조부이다. 망채정헌후(望蔡貞憲侯)에 봉작되었으며 진패선의 딸 회계목공주의 남편이다. 남조 진나라 때 시중(侍中)과 의동삼사에 이르렀다. 불교 천태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 [[심명]](沈明) : [[당나라]] 제8대 황제 [[대종(당)|대종 이예]](唐 代宗 李豫)의 부마(駙馬)로 대종의 8녀 장림공주(長林公主)의 남편이다. * [[심휘]](沈翬) : [[당나라]] 제10대 황제 [[순종(당)|순종 이송]](唐 順宗 李誦)의 부마(駙馬)로 순종의 4녀 서하공주(西河公主)의 남편이다. [[대종(당)|대종]]의 황후 '''예진황후 심씨'''(睿眞皇后 沈氏)의 5촌 당질(堂姪)이다. * [[심의(당)|심의]](沈礒) : [[당나라]] 제11대 황제 [[헌종(당)|헌종 이순]](唐 憲宗 李純)의 부마(駙馬)로 헌종의 6녀 선성공주(宣城公主)의 남편이다. * [[심분]](沈汾) : [[당나라]] 제11대 황제 [[헌종(당)|헌종 이순]](唐 憲宗 李純)의 부마(駙馬)로 헌종의 8녀 남강공주(南康公主)의 남편이다. * [[심익현(부마)|심익현]] : [[효종(조선)|효종]]의 2녀인 [[숙명공주]]의 남편. 청평도위에 봉해졌다. 영의정 [[심지원]]의 아들 * [[심종]] : [[이성계|태조 이성계]]의 2녀인 [[경선공주]]의 남편. 청원군에 봉해졌다. 좌정승 청성백 [[심덕부]]의 아들. [[세종(조선)|세종]]의 장인 영의정 청천부원군 [[심온]]의 동생 * [[심안의]] : [[세종(조선)|세종]]의 서4녀인 정안옹주의 남편. 청성위 광덕의빈부의빈에 봉해졌다. 세종의 장인 영의정 [[심온]]의 형 경창부윤 심징의 증손자 * [[심능건]] : [[영조]]의 서11녀인 [[화령옹주]]의 남편. 청성위에 봉해지고 종척집사를 지냈다. 이조판서 심택현의 증손자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공주의 남편. [[난징대학살]]의 총지휘관. * '''[[온달]]''': [[평원왕]]의 부마이자 [[평강공주]]의 부군. 부마 중에서 유명한 부마. * ~~[[이브라힘 파샤]]~~: [[쉴레이만 1세]]의 여동생 하티제 술탄의 남편으로, 오스만 제국에서 황녀와 결혼한 사람에게 붙이는 별명인 다마트를 앞에 붙여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로도 불렸다. 다만 취소선이 쳐진 건 최근의 연구 결과 때문인데, 하티제가 아니라 고관인 이스켄데르 파샤의 손녀 무시네 하툰이 아내였다는 학설이 점점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 [[이제(여말선초)|이제]] -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의 남편. 제1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비명에 간다. * --[[장성택]]--: [[북한]] [[김일성]] [[수령]]의 부마. * [[정종(부마)|영양위 정종]]: [[문종(조선)|문종]]의 부마. [[경혜공주]]의 부군. 훗날 [[단종(조선)|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처형. * [[전종]]: [[오(삼국시대)|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의 부마이자 [[손노반]]의 남편. * [[조대림]]: [[태종(조선)|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조선)|조준]]의 아들. [[조대림 사건]]의 주인공. * [[찰스 브랜던]]: [[잉글랜드]] 공주 [[메리 튜더]]의 남편. * [[충렬왕]]: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의 남편. 비록 후궁 소생이지만 자그마치 황제(대칸)의 딸을 부인으로 둔다. * [[충선왕]]: 원나라 [[계국대장공주]]의 남편. * [[충숙왕]]: 원나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의 남편. * [[충혜왕]]: 원나라 [[덕녕공주]]의 남편. * [[토머스 하워드]]: 잉글랜드 [[요크의 앤]]의 남편 * [[하후무]]: 위왕 [[조조]]의 딸 [[청하공주]]의 남편. * [[홍주원|영안위 홍주원]]: [[조선]] [[정명공주]]의 남편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의 남편. 나루히코의 장남 모리히로(盛厚)도 [[쇼와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 부찰 경수: [[청나라]] [[도광제]]의 6녀이자 [[공친왕]] 혁흔의 누나인 수은고륜공주의 남편. 그는 도광제의 아들 [[함풍제]]가 죽었을 때 고명대신 8명 중 1명이 되었다가, [[신유정변]] 때 관직에서 쫓겨났다. 후에 아들인 부찰 지단도 [[서태후]]의 양녀 [[영수고륜공주]]의 남편이 되어 부마가 되었다. ==== 가상인물 ==== * [[곤돌랜드의 마지]] - 밥: 실비아 공주의 남편. * [[대항해시대 시리즈]] - [[레온 페레로]] * [[라이온 킹 2]] - [[코부]]: 결말에 [[프라이드 랜드]]의 공주 [[키아라(라이온 킹 시리즈)|키아라]]와 짝으로 맺어진다. * [[라푼젤(애니메이션)|라푼젤]] - [[플린 라이더]]: [[코로나 왕국]]의 공주 [[라푼젤(디즈니 캐릭터)|라푼젤]]과 결혼한다. * [[레드슈즈]] - [[멀린(레드슈즈)|멀린]]: 화이트 왕국의 공주 [[스노우(레드슈즈)|스노우]]와 결혼한다. * [[뮬란 2]] - 링, 야오, 치엔포: 셋 다 후속편에서 공주들인 팅팅, 메이, 수와 이어진다. * [[슈렉|슈렉 시리즈]] - [[슈렉(슈렉)|슈렉]]: 겁나먼 왕국의 공주 [[피오나 공주|피오나]]의 남편.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등장인물]] - 부마 * [[알라딘(애니메이션)|알라딘]] - [[알라딘(디즈니 캐릭터)|알라딘]]: [[아그라바]] 왕국의 공주 [[자스민(디즈니 캐릭터)|자스민]]과 결혼한다.[* [[알라딘(영화)|실사 영화판]]에서는 자스민이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 결혼하여 국서가 되었다.] * [[원피스(만화)|원피스]] * [[퀴로스]]: 드레스로자의 공주 스칼렛의 남편. * [[스테리]]: 고아 왕국의 공주 셀리와 결혼해 고아 왕국의 왕이 되었다. * [[인어공주(애니메이션)|인어공주]] - [[에릭(디즈니 캐릭터)|에릭]]: [[아틀란티카]]의 공주 [[에리얼]]의 남편. * [[전하와 나]] - 김처선: 선혜공주와 미국으로 도피한 뒤 결혼식을 올렸다. * [[조선공주실록]]- 신홍연: 진성공주의 남편이다. * [[크로노 트리거]] - [[크로노(크로노 트리거)|크로노]]: 가르디아의 공주 [[마를(크로노 트리거)|마를]]의 남편. * [[파이널 판타지 XII]] - [[라스라 헤이오스 나브라디아]]: [[달마스카 왕국|달마스카]]의 공주 [[아셰 바나르간 달마스카|아셰]]의 남편. * [[프린세스(만화)|프린세스]] * [[스카데이 토르]]: [[스가르드]]의 [[공주]] [[요피나 토르|요피나]]를 왕비로 맞이했다. * [[야파|야파 아르고]]: [[아나토리아]]의 공주 [[테오도라 토르|테오도라]]를 왕비로 맞이했다. * [[표르도바 2세]]: 코르시카의 공주 [[파라 표르도바|파라]]를 왕비로 맞이했다. * [[해를 품은 달]] - [[허염]]: [[성조대왕]]의 부마로 [[민화공주]]의 부군. * [[혼례대첩]] - [[심정우(혼례대첩)|심정우]]: [[혼례대첩/등장인물#임금|임금]]의 부마로 [[혼례대첩/등장인물#효정공주|효정공주]]의 부군. 그가 지내는 거처의 이름을 본따 경운재 대감으로 불린다. * [[황제의 딸]] - [[복이강]]: [[건륭제]]의 부마로 [[자미(황제의 딸)|자미]]의 부군. * [[히어로메이커]] - [[윌리엄 아셀]]: 세날 왕국의 [[살라나]] 공주의 남편 * [[킹스맨 시리즈]] - [[게리 에그시 언윈]]: 스웨덴 왕실의 틸다 공주의 부군이 된다. * [[왕자(페르시아의 왕자)]] - 클래식 시리즈 한정. 이후에는 진짜 왕자로 등장한다. == 釜馬, [[부산]]+[[마산]] == [[부산광역시]]와 [[마산시]]를 묶어서 일컫는 말. 20세기 중후반 당시에는 옛 [[마산시]]가 옛 [[창원시/통합 이전|창원시]]나 [[울산시]]보다 인구가 많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남해고속도로제2지선]]의 초창기 명칭도 부마고속도로였고, 부마가 들어간 유명한 사건으로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말기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이 있다. [[2020년대]] 오늘날에는 예전처럼 자주 사용되지 않는 줄임말이 되었다. 먼저 [[마산]]보다 울산이나 창원, 김해 등이 더 큰 도시가 되면서 마산을 부산과 양대 도시로 꼽을 이유가 사라졌고,[* 구 마산 2구의 인구는 2022년 기준으로 약 36만 명으로, 경남 안에서도 [[양산시]]나 [[진주시]]와 비슷한 정도다.] 이후 [[창원시]]의 2개 구[*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로 통합 재편되어서 마산이란 도시 자체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부산을 연고지로 한 [[롯데 자이언츠]]와 마산을 연고지로 한 [[NC 다이노스]]는 두 도시 사이에 [[낙동강]]이 흐르므로 [[낙동강 시리즈]]라고 흔히 불리지만 다른 별칭으로 부마 대첩으로 부르기도 한다. NC의 창단 때부터 워낙 롯데 구단측에서 노골적으로 창단 반대를 드러낸 것부터 이어진 대립 관계로 빠르게 라이벌이 됐다. 주로 호프집 간판으로 사용된다. 대학가 등지에서 보이기도 한다. [[분류:동음이의어]][[분류: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