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중국의 행정구역, rd1=푸젠성, other2=대만의 행정구역, rd2=푸젠성(대만), other3=머리에 착용하는 의복, rd3=복건)] [include(틀:후한서)] [[服]][[虔]] 생몰년도 미상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자신(子愼)으로 사례 하남윤 형양현 사람. == 생애 == 초명은 중(重)이고 다른 이름은 기(祇)였는데 후에 건으로 개명했다. 젊어서 가난했지만 태학의 학생이 되었으며, 춘추좌씨전에 밝아 훈고학에 근거해 주석을 만들었고 효렴에 천거되어 상서랑, 고평현령을 지냈다가 중평 말년에는 구강태수가 되었다. 면직되자 난리로 인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병사했다. 복건이 남긴 주석은 춘추좌씨전해 또는 복씨주라고 불리는데, [[가규]]의 주와 쌍벽을 이루어 조위와 서진 때 [[두예]]의 주석과 병칭되었다가 수나라 이후에 유실되어 그 일부만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통속문이라는 저서를 남겼다고 알려졌지만 안씨가훈이라는 책에서 통속문에서 세간에 이르기를 그 저자는 복건이라고 했는데, 그 서문에는 위나라 때 사람인 소림과 장읍의 말을 인용한 것과 [[정현(삼국지)|정현]] 이전에는 누구도 반절음을 알지 못했다고 나온다. 그래서 완효서가 통속문은 복건이 아니라 이건이라는 사람이 남겼다고 했지만 그 사람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것이 없으므로 결국 통속문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세설신어]]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복건은 춘추에 매우 정통해 주를 달고자 해 다른 견해를 참고하려 했는데, [[최열(후한)|최열]]이 문하생을 모아 춘추전을 강론한다는 소문을 듣고 성명을 숨긴 채 최열의 문하생에게 밥을 지어 주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매번 강론할 때가 되면 지게문과 벽 사이의 틈으로 몰래 엿들었는데, 나중에 최열의 견해가 자기를 능가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잠시 여러 문하생들과 강론 내용의 장단점을 토론했다.[br] >최열은 이 일을 듣고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하다가 평소에 복건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혹시 복건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찍 가서 복건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때 "자신(子愼)!"이라고 불렀다. 복건이 엉겁결에 자기도 모르게 놀라 대답했는데, 복건과 최열은 서로 친한 벗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지은 글은 총 10여 편이 있었다고 한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복건, version=45, paragraph=2)]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관료]][[분류:한나라의 유학자]][[분류:정저우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