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3 보로운동(保路運動)}}} == 개요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이권수호운동의 일종. 특히 [[쓰촨성|사천성]]의 것이 유명하며, 줄여서 "[[보로]]"(保路)라고도 부른다. [[신해혁명]]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 원인 중 하나다. == 배경 == 청나라는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등 몇 차례 개혁이 시도될 때마다 [[무술정변]]이나 [[의화단 운동]]과 같은 [[반동]]으로 실패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백성]]들은 물론 지방의 [[사족]] 등 유력층조차 청나라를 불신하게 되었고, [[구미권]] [[열강]]의 침탈도 심화되었다. 결국 [[서태후]] 등 기득권 보수파조차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깨닫고 [[입헌군주제]]와 [[지방자치]]를 도입하고[* 중국사 최초의 [[헌법]]인 [[흠정 헌법 대강]]이 이때 탄생하였다. 다만, 실제로는 [[독일 제국]]이나 [[대한제국]]처럼 외견상 입헌군주국(사실상 [[전제군주국]])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군제와 경제, 교육제도 등을 개혁하는 총체적 개혁인 [[신축]]신정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인 [[철도]]정책도 입안되었는데,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던 [[민자철도]]를 [[국유화]]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차관]]을 들여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개발하기로 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미 [[산업화]]를 마친 서구열강보다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하여 [[티스푼 공사|공사가 매우 더디었기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자철도들은 지방 유지들부터 일반 대중까지도 폭넓게 참여하여 자본을 조성하였는데, 청나라 중앙정부는 이를 보상해줄 재원이 없었고,[* 기존 민간투자자들에게 [[주식]] 대신 [[청나라 채권|공채]]를 나누어줬는데, 이것도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실제 지급에 들어가서 신용을 얻지 못했다.] 이권수호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자본 성격까지 띠었기에 반발이 극심했다. 심지어 개중에는 외국에 부설권이 팔렸다가 다시 환수되어 민간에 풀린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다시 되돌리게 된 셈이었다. == 전개 == 청나라에서 추진한 국유화와 외자 유치는 [[한족]] 대중으로 하여금 이민족인 [[만주족]]이 [[외세]]로서 서구열강과 결탁하는 것으로 비추어졌고, 각지 [[신사(중국)|신사]] 등 상류층도 재산권과 참정권을 침해받아 반발하였다. 그 결과 곧 철도를 보호하는 운동 즉 보로운동이 발생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대중 [[시위]]와 지방의회인 자의국을 중심으로 철회안을 상주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와 대중 간 갈등이 첨예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격심했던 곳은 투자금 자체가 커서 현금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동자나 교사 등 일반인의 지분이 컸던 사천성이었다. 처음에는 입헌파 유지들을 중심으로 합법단체인 사천보로동지회가 결성되어 시위와 동맹휴학, 동맹휴업 등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저항하였으나, 청 정부의 무시와 탄압 속에서 혁명파인 중국동맹회가 동지회 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저항방식도 거세졌다. 이에 정부가 아예 지도부를 체포하고 석방요구집회를 유혈진압하면서 시위대도 사천보로동지군을 결성해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천 보로운동은 곧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청두시|성도]](成都)가 함락되고 총독 조이풍이 붙잡혀 참수될만큼 격렬하고 규모가 커졌다. == 결과 == 단순한 [[소요]]를 넘어서 혁명파의 지도를 받는 [[민란]]으로 격화되면서 이미 지방당국 차원에서 진압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으므로, 중앙정부로서는 다른 지역의 군대를 불러서 진압에 나서야만 했다. 이때 동원된 것이 '''[[후베이성|호북]] 신군'''이었는데, 당시 중국동맹회가 혁명을 위해 호북 신군의 인원 상당수를 암암리에 포섭해두었던 까닭에[* 이전에 [[쑨원]]은 변방을 거점으로 삼고 해외지원을 중시하는 "변경혁명"을 시도하였으나 광주봉기 등 일련의 실패로 말미암아 동맹회 내에서 실각했는데, 이후 동맹회는 몇 차례 성급하게 봉기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쑹자오런]]을 중심으로 이전과는 반대로 내부 중심지에서 혁명을 시작해나가는 "장강혁명"이라는 이론과 전략을 세웠고, 이를 위해 사회 각층 및 군 조직 내에 침투하여 혁명세력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동맹회에서는 이를 "혁명화의"라고 불렀는데, 호북성에서 꽤 성과를 거두어서 봉기 직전 호북 신군의 [[사병]] 중 1/3 정도는 혁명파 소속이었다.] 이 공백기를 놓치지 않고 '''[[우창구|무창]]'''에서 봉기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나라가 붕괴되고 [[신중국]]의 성립으로 이어진 [[신해혁명]]이다. == 관련 문서 == * [[신해혁명]] * [[중화민국 군사정부]]([[후베이 군정부]]) [[분류:청나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