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8호}}}]]''' || ||<-2> {{{#fff {{{+1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br]{{{-1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보령 성수사지 낭혜화상탑비, 너비=100%, 높이=200px)]}}}|| || '''위치'''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br] ||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 '''시설''' || 1기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건축시기''' || [[통일신라]] [[진성여왕]] 4년(89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12211.jpg|width=100%]]}}} || || {{{#fff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 [목차] [clearfix] == 개요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성주사 터에 있는 [[통일신라]] 시기에 세워진 탑비. 신라 하대의 [[승려]]인 낭혜화상 무염(800~888)의 비문이다. 속세의 성은 신라의 [[국성]]인 김씨로 [[태종 무열왕]]의 8세손이다. 조상은 [[진골]]이었지만 [[골품]]이 떨어져 [[6두품]]이 되었다고 해, 신라 골품제 연구에서 주목받는 비문이기도 하다. 13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수학하고 당나라 [[장안]]에 30여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헌강왕]], [[정강왕]] 시기에 신라 불교의 필두인 국사를 역임하며 능력있는 이를 등용해 쓸 것을 진언하는 등의 행적을 펼치다 진성여왕 때 89세로 입적했다.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글을 쓴 4개의 비문[* 이를 4산비문, 혹은 사산비명이라고 일컫는다. 낭혜화상탑비 외의 나머지 3개는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가 있다. 이 중 다른 셋은 지금까지 비석 실물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전하지 않고 일부 파편만이 남아있다. 다만 숭복사비의 내용은 따로 후대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겨 지금까지 전해진다. 현재 경주시 숭복사 터에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중 하나이다. 현전하는 통일신라 비석 중에 가장 큰 규모[* 높이 4.55M]이며 조각이 수려하게 놓아져 있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는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썼다. 특히 낭혜화상의 집안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 [[진골]] 가문에서 [[6두품]]으로 강등되는 과정이 적혀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골품제]]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서 평가 받고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보령시]][[분류:신라의 금석문]][[분류:보령시의 문화재]][[분류:최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