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토스카나 변경백 및 후작)] [include(틀:역대 스폴레토 공작)] ||<-3><#FF4500> '''{{{#FFF 토스카나 12대 변경백[br]스폴레토 46대 공작}}}''' [br] {{{+2 {{{#FFF '''Boniface IV | 보니파초 4세'''}}}}}} || ||<-3> [[파일:보니파초 4세.jpg|width=100%]] || ||<|3><#FF4500> '''{{{#FFF 성명}}}''' ||<#FF4500> '''[[한국어|{{{#FFF 한국어}}}]]''' ||보니파초 4세 || ||<#FF4500> '''{{{#FFF 이탈리아어}}}''' ||Bonifacio IV || ||<#FF4500> '''[[영어|{{{#FFF 영어}}}]]''' ||Boniface IV || ||<-2><#FF4500> '''{{{#FFF 생몰 년도}}}''' ||985년 ~ 1052년 5월 6일 || ||<-2><#FF4500> '''{{{#FFF 재위 기간}}}''' ||1027년 - 1052년(토스카나 변경백)[br]1043년 - 1052년(스폴레토 공작) || [목차] [clearfix] == 개요 == [[토스카나 후작령|토스카나 백국]] 12대 변경백, [[스폴레토 공국]] 46대 공작. 자신이 속한 카노사 가문이 11세기 북이탈리아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다. == 행적 == 985년경 만토바, 브레시아, 모데나, 페라라, 레지오의 백작을 역임한 테달트와 스폴레토 공작이며 이탈리아 국왕 위그의 [[사생아]]인 [[우베르토]]의 딸인 윌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속한 카노사 가문은 특정한 영지에 얽매이지 않고 토지 구입이나 상업 활동을 통해 자산을 창출했다. 특히 영주, 교회 등 지역 권력자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데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기에, 여러 영주 및 교회 성직자들의 호의를 사 그들로부터 특혜를 얻어냈다. 여기에 여러 유력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어 권력을 강화했으며, 때로는 무력을 동원해 정적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식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007년 아버지로부터 만토바 백작위를 물려받은 보니파초는 101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의 편에 서서 이브레아 변경백 아르두인을 몰아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016년 다시 하인리히 2세의 편에 서서 토리노 변경백 울리코 만프레디 2세를 물리쳤다. 1020년 형제 코라도가 카노사 가문의 재산을 혼자서 독차지하고자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이를 간단히 물리치고 코라도와 화해했다. 1027년 [[콘라트 2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기 위해 아키텐의 기욤 5세, 프랑스의 [[로베르 2세]]와 아들이자 공동왕 위그를 상대로 경쟁했을 때, 그는 콘라트 2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콘라트 2세는 마침내 숱한 방해공작을 뚫고 로마에 입성한 뒤 [[라니에리(토스카나)|라니에리]]가 자신을 막으려다가 사망하면서 변경백이 비어버린 토스카나 변경백을 보니파초가 겸임하게 했다. 그는 이리하여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부상했다. 1036년 콘라트 2세의 아들 [[하인리히 3세|하인리히]]와 [[크누트 대왕]]의 딸 군힐다의 결혼식이 열린 네이메헌에 가서 그 곳에 한 달 이상 머물면서 콘라트 2세의 황후인 슈바벤의 기젤라의 조카이자 수양딸인 로렌의 베아트릭스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베아트릭스는 지참금으로써 로렌의 중요한 자산인 브리이 성과 스테네이, 무제이, 쥐비니, 롱리에 등 여러 영지를 가져왔다. 베아트릭스와 결혼한 뒤 토스카나로 돌아온 보니파초는 1036년 초여름 콘라트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블루아 백작 오도 2세를 격파했고, 뒤이어 황제를 상대로 반기를 든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에게 가담한 파르마를 제압했다. 1038년 2월 콘라트 2세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정성껏 대접했다. 1043년 콘라트 2세는 그동안 제국에 공헌한 그에게 보답하고자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백국을 수여했다. 여기에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주요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 후 만토바에 주로 거주하면서 자신이 관할하는 광할한 영토를 통치했다. 1046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한 뒤 [[로마왕]]에 오른 [[하인리히 3세]]가 황후 아그네스와 함께 피아첸차에 도착했을 때 환영했다. 그러나 그와 하인리히 3세와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그가 신하로서 과도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에게 심대한 위협이 될 거라 여겼다. 하인리히 3세의 이러한 우려는 보니파초가 교황 선임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1047년 8월 교황 [[클레멘스 2세]]가 사망한 후, 지난날 2번이나 교황에 선임되었다가 폐위되었던 [[베네딕토 9세]]가 보니파초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어 그 해 11월에 교황에 복위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로마 시민들은 하인리히 3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새 교황을 지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는 브릭센의 주교 포포를 새 교황 [[다마소 2세]]로 선임했다. 보니파초는 로마로 향하는 다마소 2세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베네딕토 9세가 이미 교황에 올랐다며 그를 로마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마소 2세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하인리히 3세는 보니파초에게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송하고 베네딕토 9세를 폐위시키라고 명령했다. 보니파초는 이번에는 황제의 뜻에 따라 다마소 2세를 로마로 호위하여 베네딕토 9세를 축출한 뒤 7월 17일에 다마소 2세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다마소 2세는 즉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9일에 로마시 외곽의 팔레스트리나에서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증세가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와 유사한 점을 들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고 추정하지만, 당대에는 보니파초가 교황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듯 위세를 떨치던 보니파초는 1052년 5월 6일 산 마르티노 또는 스핀다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암살자들이 하인리히 3세의 사주를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의 유해는 만토바의 성 미카엘 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페데리코(토스카나)|페데리코]]가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지만, 하인리히 3세가 카노사 가문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 가족 == * 리칠데(1034년에서 1037년 사이에 사망): 베르가모 궁전백 기젤베르트 2세의 딸. 자식을 낳지 못했다. * 베아트릭스(1020 ~ 1076): 상로렌 공작이자 바르 변경백 프리드리히 2세의 딸이자 [[콘라트 2세]] 황제의 황후 기젤라의 조카. 보니파초 4세 사후 페데리코와 마틸다의 섭정을 맡았으며, 1054년 하로렌 공작 고드프리 3세와 재혼했다. * [[페데리코(토스카나)|페데리코]](1040 ~ 1055): 보니파초 3세 사후 토스카나 변경백에 취임했으나 3년만에 사망했다. * 베아트리체(? ~ 1053년 이전): 요절. * [[토스카나의 마틸다|마틸다]](1046 ~ 1115): 페데리코 사후 토스카나 여변경백에 취임했다.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분류:토스카나 변경백]][[분류:스폴레토 공작]][[분류:985년 출생]][[분류:1052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