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white '''{{{+1 C. Bechstein Pianoforte Aktiengesellschaft}}}'''}}} || ||<-3> [[파일:Bechstein 로고.jpg|width=100%]] || ||<-2><:>'''{{{#white 창립}}}'''||[[1853년]] || ||<-2><:>'''{{{#white 창립자}}}'''||칼 베히슈타인 || ||<-2><:>'''{{{#white 본사}}}'''||[[독일]] [[베를린]] || ||<-2><:>'''{{{#white 링크}}}'''||[[https://www.bechstein.com/en/|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0]]]] {{{-2 (공식 사이트)}}} || [[파일:Bechstein grand.jpg]] [목차] == 개요 == '''Bechstein''' [[독일]]의 피아노 제작자 칼 베히슈타인(Carl Bechstein)이 창립한 [[피아노]] 제조 회사와 거기서 만들고 있는 피아노 명칭. 분명히 독일 회사지만, 한국에서는 [[영어]]의 강한 영향력 때문인지 '벡스타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당장 삼익악기가 먹었을 때도 벡스타인이라고 홍보하는 바람에 아예 미국 회사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예 독일계 미국인이 설립한 [[스타인웨이]]를 제외하면 [[뵈젠도르퍼]]나 [[자일러]] 등의 독어권 악기 브랜드를 영어식으로 부르지 않는 만큼, 이 브랜드 명칭도 [[독일어]] 식으로 읽는 것이 좋다.[* 물론 독일어 발음으로 읽어도 chs의 실제 발음은 /çʃ/가 아닌 /kʃ/에 가깝게 나기 때문에 '베히슈타인'이 아닌 '벡슈타인'에 가깝게 발음한다. nächst를 '네흐스트'가 아니라 '넥스트'로 읽는 것과 비슷한 경우.] ~~물론 지도 교수나 여타 높으신 분들이 벡스타인이라고 읽는다면? 까라면 까야지~~ == 역사 == 1853년에 [[베를린]]에 제조 공장과 사무실을 마련해 창업했고, 3년 뒤인 1856년 [[그랜드 피아노]] 생산을 시작했다. 이듬해 독일의 유명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가 베히슈타인 그랜드 피아노로 [[프란츠 리스트|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를 연주한 뒤 명기로 호평하면서 이내 [[스타인웨이]]와 [[블뤼트너]]에 버금가는 독일 유수의 피아노 제조업체가 되었고, 소나타의 작곡자 리스트 자신도 [[뵈젠도르퍼]]와 함께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피아노로 평가해 공연과 작곡에 사용했다. 1881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피아노를 진상했고, 이후 영국의 [[귀족]] 등 [[높으신 분들]]의 주문이 잇따르자 첫 해외 지사를 설립했다. 1890년에는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와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지사와 전시장을 설립했고, 1901년에는 [[런던]]에 자사의 이름을 딴 소공연장인 베히슈타인 홀[* [[제1차 세계대전]] 때 적국 재산으로 압류되었다가 1917년에 홀이 위치한 거리 이름을 따 위그모어 홀(Wigmore Hall)로 개칭되었고, 지금도 많은 연주자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을 설립해 판촉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1차대전]]이 시작되자 중요한 해외 시장인 [[영국]]과 [[러시아]]가 적국이 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패전 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 피아노 제작 기술을 개량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업라이트 피아노]] 제조에 중점을 두어 간신히 경영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1930년에는 [[지멘스]]와 합작으로 전자 픽업을 장착한 첫 일렉트릭 피아노인 '네오-베히슈타인(Neo-Bechstein)' 을 개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의 실세가 되면서 회사가 또다시 맛이 가기 시작했는데, 당장 최고 경영자였던 에트빈과 헬레네 베히슈타인 부부가 심각한 나치빠였다. 베히슈타인 부부는 히틀러에게 거액의 정치 자금과 고급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를 비롯한 사치스러운 선물을 제공했고, 공식 석상에서도 나치 찬양 발언을 하면서 회사의 대외 이미지는 [[막장]]이 되었다. 결국 그 업보였는지, [[제2차 세계대전]] 후반이었던 1945년에 베를린 본사와 공장이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파되었고, 중요한 기술진들도 죽거나 부상을 입는 바람에 또 심한 타격을 입었다. 패전 후 회사는 연합군 군정의 엄한 통제를 받았고 친나치 발언을 한 고위급 간부들은 재판에 회부되거나 비나치화(또는 탈나치화) 심사를 받아야 했다. 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1948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피아노 생산을 재개해 침체기를 벗어났지만, [[냉전]]의 여파로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베를린이 동서로 분할되자 또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결국 1963년에 회사의 모든 [[주식#s-2|주식]]을 [[미국]]의 볼드윈 피아노 컴퍼니에 팔아치우고 자회사가 되었고, 그러고도 왕년의 생산량과 판매량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다. 1986년에 서독의 피아노 제작자이자 공연 흥행주인 칼 슐체가 볼드윈에서 경영권을 사들여 독일 업체로 복귀했다. [[독일 재통일|독일 통일]] 후 베를린과 [[작센]] 지방에 공장을 재건하는 등 과감한 투자 전략을 도입했다. 1996년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주식 상장을 시작했고, 2003년에 [[대한민국]]의 [[삼익악기]]가 주식 대부분을 매입해 자사 브랜드로 두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에 베히슈타인의 재정 상태가 안정권에 들어서고 삼익도 미국 스타인웨이에 집중적인 투자를 결정하면서 다시 주식을 전량 매도했고, 현재 대부분의 주식은 독일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다. 지금도 여러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악기로 남아 있지만, 나치 시대의 [[흑역사]] 때문에 브랜드 가치에 큰 타격을 입었고 [[냉전]] 시대의 어정쩡한 위치와 낮은 판매량 때문에 인지도가 떨어진다. 회사 측도 이미지 개선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지, 2006년에 [[러시아]] 출신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후원으로 베히슈타인 콩쿠르를 개최하기 시작했고 2010년에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상하이]]에 사무소를 개설했다. [[분류:독일의 악기 제조사]][[분류:전범기업/나치 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