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베르나르 8세 다르마냐크[br] Bernard VIII d'Armagnac || ||<-2><:> '''이명''' ||<(> 베르나르 드 파르디악[br] Bernard de Pardiac || ||<-2> '''생몰년도''' ||<(> [[1400년]] [[3월 26일]] ~ [[1462년]] [[5월 4일]] || ||<-2>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 || ||<-2>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르디악 || ||<-2> '''아버지''' ||<(>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 || ||<-2> '''어머니''' ||<(> 베리의 본 || ||<-2> '''형제''' ||<(> [[장 4세 다르마냐크|장 4세]], 마리, 본, 안, 잔, 베아트리스 || ||<-2> '''배우자''' ||<(> 부르봉의 엘레오노르 || ||<-2> '''자녀''' ||<(> 본, 자크, 카트린, 장 || ||<-2> '''직위''' ||<(> 파르디악 백작, 라 마르쉐 백작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부르고뉴군과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 행적 == 1400년 3월 26일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베리 공작 [[장 드 베리]]의 딸 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장 4세 다르마냐크|장 4세]], 마리[* 1397 ~ 1404/1405, 요절], 본[* 1399 ~ 1415,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아내], 안[* 1402 ~ 1473, 알브레 영주 [[샤를 2세 달브레]]의 아내], 잔[* 1403, 요절], 베아트리스[* 1406 ~ 1418, 요절]가 있었다. 1415년 리옹의 세네샬인 [[움베르 드 그로슬리]] 휘하 군대에 배속된 뒤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에 맞서 3년간 오베르뉴 일대에서 항전했다. 1418년 6월 아버지 베르나르 7세가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에서 부르고뉴군에게 잡혀 피살당한 뒤 형 장 4세와 함께 부르주로 피신한 후 1419년 [[샤를 7세|도팽 샤를]]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를 위해 싸웠다. 1423년 장 4세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했다. 장 4세는 아르마냐크 백작령을 물려받았고, 그는 파르디악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이후 '베르나르 드 파르디악'으로도 일컬어졌다. 1423년 [[샤를 7세]]에 의해 마송, 리옹, 샤롤레 일대의 군사 총독이자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424년 장인인 라 마르쉐 백작 자크 2세 드 부르봉으로부터 라 마르쉐 백국의 총독 권한을 수여받았으며, 1432년 라 마르쉐 영주권을 계승할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429년 [[잔 다르크]]의 [[루아르 원정]]에 참여했으며, [[파테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1441년 리모주의 총독에 선임되었고, 1461년 랑그독 및 루시용의 총독에 선임되었다. 한편, 그는 샤를 7세의 장남 [[루이 11세|도팽 루이]]의 가정교사를 맡았다. 이에 대해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성품이 까탈스럽기로 악명이 자자한 루이를 가르치는 건 잉글랜드와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 거라며, 그가 가정교사 직무를 훌륭히 수행한 것은 훌륭한 미덕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느무르 공작령의 영토를 상속받은 부르봉의 엘레오느와 결혼했기에 종종 느무르 공작으로 불렸지만, 실제로 그 직함의 권리를 누렸다고 보긴 어렵다. 1446년 8월 13일, 파리 의회는 그와 아내인 부르봉의 엘레오노르가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의 후계자들에게 제기한 느무르 공작위 계승권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수리아 1세의 남편이었던 [[추안 2세]]와 수리아 1세의 아들 [[카를로스 4세(나바라 왕국)|카를로스 4세]]는 계속해서 느무르 공작의 칭호를 추가했으며, 프랑스 왕실 역시 그를 느무르 공작이라고 정식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국왕 칭호에 추가했다. 1461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베르나르의 아들 자크에게 느무르 공작직을 넘겨줬다. 1462년 5월 4일 파르디악에서 사망했다. == 가족 == * 부르봉의 엘레오노르(1407 ~ 1463): 라 마르쉐와 카스트르 백작 자크 2세 드 부르봉과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나바라 왕국)|카를로스 3세]]의 딸인 나바라의 베아트리체의 딸. * 본 다르마냐크(1434 ~ 1462): 칼랏 성에서 살면서 수많은 가난한 여인 및 빈민들을 구제하고 할머니 이자벨 드 로데츠가 설립했던 보이세의 생클레어 수도원을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1459년 수녀원에 들어가 3년간 수도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사후 [[복자]]로 [[시복]]되었다. * 자크 다르마냐크(1437 ~ 1477): 파르디악 백작과 카스트르 백작, 느무르 공작. 1465년 대귀족들이 루이 11세에 대항하여 공익 연맹을 결성했을 때 가담했다가 사면받았고, 1467년 노르망디 공작이었다가 루이 11세의 공격으로 쫓겨난 샤를 드 발루아[* 샤를 7세의 다섯번째 아들]와 서신을 주고받다가 루이 11세의 의심을 사는 바람에 루이 11세의 지시를 받은 랑그독 총독 [[장 2세 드 부르봉]]의 공격을 받고 항복한 뒤 1470년에 충성 맹세를 다시 어기면 모든 소유물을 즉시 몰수하고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재판을 받겠다는 조건으로 사면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샤를 드 블루아, 사촌 장 5세 다르마냐크, 프랑스 무관장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과 서신을 교환했다가 반역을 모의했다는 고발을 받고 1476년에 발각되어 또다시 왕실군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모든 영지와 재산을 헌납하고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뒤 1477년 8월 4일 파리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 카트린 다르마냐크(1438 ~ 1503): 아미앵의 생클라라 수녀원장. * 장 다르마냐크(1439 ~ 1493): 오리야크 수도원장이자 카스트르의 주교. [[분류:프랑스의 귀족]][[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백년전쟁/인물]][[분류:1400년 출생]][[분류:1462년 사망]][[분류:보르도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