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베네치아 공화국]] [include(틀:이탈리아의 역사)] ---- [include(틀:키프로스의 역사)] ---- ||<-3> {{{#FFD700 {{{+3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 '''가장 고귀한'''이라는 명칭은 국가의 주권을 의미하며 [[유럽]] 여러 국가의 호칭이었다. 대표적으로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가장 고귀한 공화국]]'''이었으며 현재는 [[산마리노]]가 유일하게 '''가장 고귀한 공화국'''이라 불리는데, 산마리노의 정식 국호는 그냥 [[산마리노 공화국]]이라서 [[가장 고귀한 산마리노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별칭이다. 해당 공화국의 국가 원수는 '''가장 고귀한 자'''(Most Serene Highness)라고 호칭한다. Serene의 뜻이 '''고귀'''와 함께 '''고요'''가 있다 보니 이를 '''가장 고요한 공화국'''으로 [[오역]]하기도 한다.][br]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br]'''Serenìsima Repùblega de Venèsia'''}}} || ||<-2> [[파일:베네치아 공화국 국기.svg|width=100%]] || [[파일:베네치아 공화국 국장.svg|width=60%]] || ||<-2> '''{{{#FFD700 국기}}}''' || '''{{{#FFD700 국장}}}''' || ||<-6><:> {{{#8B0000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br]{{{#c61a1a '''평화가 그대에게 있으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 ||<-6>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베네치아 공화국 위치.svg|width=100%]]}}} || ||<-6><:> {{{#000,#ddd {{{-1 17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이 지도가 보여주는 시기에는 크레타섬을 비롯한 동지중해 곳곳의 섬을 거의 모두 상실하고 육지 영토만 남은 시기이다. 해양국가로서의 [[전성기]]때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말 그대로 '''동지중해의 여왕'''이었다. ] || ||<-6><:> '''{{{#FFD700 [[697년|{{{#FFD700 697}}}]]~[[1797년|{{{#FFD700 1797}}}]]}}}''' || ||<-2> '''{{{#FFD700 성립 이전}}}''' || '''{{{#FFD700 멸망 이후}}}''' || ||<-2> '''[[동로마 제국|{{{#fae572 동로마 제국}}}]]''' || [[합스부르크 제국|{{{#FFD700 '''합스부르크 제국'''}}}]] || || '''[[수도(행정구역)|{{{#FFD700 수도}}}]]''' ||<-2>[[베네치아]] || || {{{#FFD700 '''정치 체제'''}}} ||<-2>[[귀족공화제]] || || {{{#FFD700 '''국가 원수'''}}} ||<-2>[[베네치아 도제]] || || {{{#FFD700 '''주요 도제'''}}} ||<-2>[[엔리코 단돌로]][br][[야코포 티에폴로]][br]프란체스코 포스카리[br]프란체스코 모로시니 || || {{{#FFD700 '''면적'''}}} ||<-2>65,790km² (1789년) || || {{{#FFD700 '''인구'''}}} ||<-2>2,844,212 명 (1789년) || || {{{#FFD700 '''민족'''}}} ||<-2>[[이탈리아인]] || || {{{#FFD700 '''언어'''}}} ||<-2>[[베네토어]][br][[이탈리아어]][br][[라틴어]] || || {{{#FFD700 '''종교'''}}} ||<-2>[[가톨릭]] || || {{{#FFD700 '''통화'''}}} ||<-2>[[두카트]] || || {{{#FFD700 '''주요 사건'''}}} ||<-2>'''[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left: 0px; margin-top: -22px" {{{#!folding           697년 건국[br]1082년 동로마의 [[금인칙서]][*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이 금인칙서를 받아내며 사실상의 자치국으로 떨어져 나갔다.][br]1117년 베네치아 강화[br]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br]1412년 모타 조약[*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지기스문트|지그몬드]]와 맞서 싸워 승리했고, 이 조약으로 [[발칸 반도]] 서부 지역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다.][br]1571년 [[레판토 해전]][br]1669년 [[크레타]] 상실[br]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br]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 [[나폴레옹]]은 북이탈리아에 괴뢰국들을 세우는 대신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를 넘겨주었다.]}}}}}} || || {{{#FFD700 '''국가'''}}} ||<-2>[[https://youtu.be/HHfyBCBg0V0|Inno Nasionale Veneto]] || || {{{#FFD700 '''현재 국가'''}}} ||<-2>[[이탈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그리스]], [[키프로스]][* 미승인국까지 포함하면 [[북키프로스]]도 해당한다.] || ||<:><-2> {{{#FFD700 '''언어별 명칭'''}}} || || [[베네토어]] || Serenìsima Repùblega de Venèsia || || [[이탈리아어]] ||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 || [[라틴어]] || Respublica Veneta || ||<-2><:> 기타 언어별 명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시칠리아어]] || Vinezzia || || [[독일어]] || Venedig || || [[프랑스어]] || Venise || || 중세 [[프랑스어]] || Venisse || || [[스페인어]] || Venecia || || [[영어]] || Venice || || [[중세 영어]] || Venyse || || [[헝가리어]] || Velence || || [[세르비아어]] || Венеција / Venecija || || [[그리스어]] || Βενετία (''Venetía'') || || [[오스만어|오스만 터키어]] || وندیك (''Venedik'') || || [[아랍어]] || اَلْبُنْدُقِيَّة (''al-bunduqiyya'') || || [[페르시아어]] || ونیز (''Veniz'')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탈리아 반도]] 동북부 해안에 존재했었던 [[공화국]]으로, [[수도(행정구역)|수도]]는 [[베네치아]]였다. [[중세]]에 [[제노바 공화국]]과 함께 [[서유럽]]과 [[중동]]을 잇는 양대 [[해상 공화국]][* [[해양 공화국]], [[상인 공화국]]이라고도 한다.]으로 군림했던 [[국가]]다. == 상징 == === 국기 === ||<:> {{{+3 {{{#FFD700 '''평시 국기와 전쟁 국기'''}}}}}} || ||[[파일:베네치아 공화국 국기.svg|width=100%]]|| ||<:> {{{#FFD700 '''평시 국기'''}}}|| ||[[파일:베네치아 공화국 전쟁기.svg|width=100%]]|| ||<:> {{{#FFD700 '''전쟁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인 [[사자]]는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인 [[마르코(복음사가)|복음사가 마르코]]를 상징하는 '산 마르코의 사자'이다. 공화국의 국기는 이 산 마르코의 사자를 감싸는 6개의 테두리가 감싸져 있는 형태인데,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구역인 '세스티에레'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형태의 국기가 최초로 사용된 예는 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 평상시에는 산마르코의 사자가 펼쳐져있는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의 국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시 상황에 돌입했을 경우, 사자가 성경을 움켜지고 대신 칼을 빼들고 있는 모습의 국기로 대체하여 사용했다. 성경에 적혀있는 문구인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 는 [[라틴어]] 문구로, <[[마르코의 복음서]]>에 적힌 >'''"평화가 그대에게 있으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 당대 국기의 판본에 따라 문구의 끊기는 지점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나 국장뿐만 아니라 모든 산 마르코의 사자가 나타나는 회화/조각에서 모두 제각각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라는 뜻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표어이자 역대 베네치아 [[라틴 총대주교]]의 표어였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행정구역인 [[베네토]]와 [[베네치아]]는 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에서 약간의 변형을 거쳐서 사용하고 있다. == 역사 == === 건국 ===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서 파두아, 아퀼레이아, 콘코르디아, 트레비소, 알티노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베네치아 [[석호]]의 섬들[* 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로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이들의 정착과 함께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지대가 물러서 제대로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만 머물 곳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아예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 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육체 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더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 상임 통치 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와 토르첼로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럿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7세기]] 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에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인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 ^^(697년 ~ 717년)^^와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라벤나 총독)|파울로스]]는 동일 인물이었고, 이에 선출의 형식은 따랐으되 실제로는 아직 자치권을 인정받은 단계는 아니라는 추측이 있다. 그의 후임자는 본래 그 휘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첼로 테갈리아노였다. 그러나 726년 [[성상 파괴주의|성상 파괴령]]을 둘러싸고 동 • 서 교회간 논쟁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2세]]의 촉구에 반응하여 총독의 관할 지역 군인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우르수스 ^^(726년 ~ 737년)^^였다. 그는 [[레온 3세]]의 라벤나 정복을 지지해 군인과 선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베네치아에 각종 특권을 내려주고, 우르수스를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면서 "히파투스"[* [[고대 로마]] 시대의 [[집정관]](Consul)을 뜻하는 [[그리스어]]]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된다. 751년경 랑고바르드족은 결국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무너뜨렸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 나중에 공식 명칭도 "[[도제]]"가 됨.] 이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고,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휘젓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현재 [[베네치아]] 섬 동쪽 끝에 위치한 San Pietro di Castello가 주교좌였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과의 세력 싸움의 일환으로 지금껏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별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를 눈독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피핀 카를로만]]을 시켜 배를 건조해 이 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싸움 및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다툼으로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동로마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임시 휴전 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동로마에 넘겨졌고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라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군은 텅 빈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어두웠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시간이 끌리며 케팔리니아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불가르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과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고[* 다만 '''로마 황제'''가 아닌 그냥 '''황제'''로만 인정했다.] 동맹을 채결했다. 그리고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 ^^(811년 ~ 827년)^^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 궁과 산 마르코 성당을 건설한다. 이렇듯 서로마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 ~ 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로마 제국]] 자체의 [[인프라]]와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즉,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전혀 없다.''' 이런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의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베네치아, version=587, paragraph=2)] === [[동로마 제국]]의 [[패권]] 상실 === 동로마 제국의 [[지중해]] 패권 상실로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베네치아는 북이탈리아에 남은 유일한 동로마의 거점이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는 친(親) 동로마, 친(親) 프랑크, 친(親) 랑고바르드, 완전한 자주국으로의 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끊임 없이 경쟁하여 세습 왕조가 창건되는 것을 막았다. 베네치아는 이 시기부터 서서히 어촌에서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로 탈바꿈 하였다. [[조선업]] 또한 발전하여 후일 베네치아의 강력한 [[함대]]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810년 프랑크의 [[피핀|피핀 카를로만]]과 전투하여 승리한 이후 베네치아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9세기 중반부터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상당히 강해졌고, 이를 이용하여 [[이스트라 반도]]도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이후 10세기 말부터 내부분열이 완화되자,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1000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Pietro II Orseolo)는 [[크로아트 왕국]]과 아드리아 해에서 암약하는 슬라브 해적들을 때려잡으며 [[달마티아]] 일부를 차지한 이후 달마티아 공작(Dux Dalmatiae)를 칭했다. 1082년 베네치아는 동로마로부터 [[금인칙서]]를 받아내었고,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독립이 다른 북부 [[도시국가]]들에 비해 늦었던 이유는 아드리아 해 일대의 지리적인 특징에도 있었다. 아드리아 해의 양안, 즉 [[발칸 반도]]와 남이탈리아를 모두 영토로 삼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가 약간이라도 반항할 낌새를 보이기만 하면 바로 해상 봉쇄를 시행하여 베네치아의 목줄을 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로 동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동로마 제국의 발등에 급한 불이 떨어지고 동시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이 남이탈리아를 장악하고 동쪽 그리스 본토를 넘보면서 베네치아에 신경 끌 여를이 없어지게 된 [[알렉시오스 1세]]는 그리스를 침공한 로베르 기스카르를 몰아내는데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각종 무역 혜택과 함께 베네치아 도제를 명목상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베네치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 십자군 전쟁 === 중세 성기에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무역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했고 아드리아해 너머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여러 십자군들을 해로로 운송해주고 더 나아가서 [[십자군 국가|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에게 보급품이나 해군력을 제공해 줌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금전적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12세기 동안에는 베네치아에 대규모의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제위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4세]]를 징벌하기 위해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앞장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나서기도 했다. 이미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 주둔해 있던 덕분에 어렵잖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정교회]] 국가들로부터 어그로가 끌리게 되었고 심지어는 [[인노첸시오 3세|교황]]에게 [[파문]]까지 당하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역이 많이 오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지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던 덕에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 독점 국가로 등극하면서 동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부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 전략적 가치가 큰 영토들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이때 낙소스도 영향권에 두게 되었다. 1221년에는 [[몽골]]과도 무역 협정을 맺었다. ===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베네치아-제노바 전쟁)] [[13세기]] ~ [[14세기]]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1261년 라틴 제국이 [[니케아 제국]]에게 멸망하고 [[미하일 8세]]가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와 [[흑해]]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동로마 제국과 손을잡은 제노바 공화국이 빼앗으려고하자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만큼의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와의 전쟁이었기에 때로는 큰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왕국]],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고 제노바군이 도시 외곽까지 돌입하는 등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물론 반격을 가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휴전을 조건으로 많은 영토들을 잃고 말았다. 특히 헝가리에게는 [[달마티아]]의 대부분을 잃었다. 제노바와의 전쟁을 겪은 후 베네치아는 섬 주위에 육상 영토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을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끝난 뒤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술수를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진출해 1405년 파도바를 정복하는 등 [[이탈리아 반도|본토]] [[속령]]들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에는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되었다. 1410년 베네치아의 함대는 3,300척 규모에 달했으며, 헝가리가 쇠퇴하면서 달마티아도 다시 회복했다. 한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기치 아래에서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서부로 들어와 동로마령 아나톨리아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1299년에는 [[오스만 1세]]가 오스만 베이국을 세우고 동로마 제국의 잔여 아나톨리아 영토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 === [[소아시아]] 북서부의 조그마한 세력에 불과했던 오스만은 건국 이후 동로마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더니 [[발칸 반도]] 일대가 [[내전]]과 계승분쟁, 자연재해 등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까지 진출하였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앞바다인 [[에게 해]]와 동지중해 일대의 헤게모니를 쥔 베네치아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이후 베네치아와 오스만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백년간 충돌하게 되었다. 물론 1396년 오스만이 십자군을 격파한 [[니코폴리스 전투]] 당시 베네치아는 대 오스만 십자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413년부터 1419년까지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일대에서 베네치아와 오스만 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이 벌어지는 등 이전에도 두 세력 간에 대결은 있어 왔다. 그러니까 베네치아와 오스만과의 본격적인 충돌은 1423년 [[테살로니키]] 공성전부터였다. 1422년 오스만 군이 동로마령이었던 테살로니키를 포위하자 위기에 빠진 동로마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에 넘겼는데, 자신들이 포위하는 사이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 땅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오스만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와 베네치아가 맺은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테살로니키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결국 수년간의 포위 끝에 1430년 베네치아는 테살로니키를 포기하게 되었고 테살로니키는 이때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술탄국]]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제4차 십자군 전쟁|병주고 약주냐?]]~~. 그러나 교황청과의 협상 등이 발목을 잡은 데다[* 당시 [[교황]]은 자기네들도 구원 함대를 모으고 있다면서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탈리아의 중소 도시 국가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여 끝내 함대를 결성하지 못했다.]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우선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 해의 섬 곳곳에 있는 함대가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이후 베네치아 함대는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구원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풀었을 가능성이 많았고,[* 당시 오스만은 육상 강국이었지만 해군은 연안해군 수준이었다. 차라리 당시 오스만 출신 해적들이 출전하는 게 나았을 정도.]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오스만 술탄국이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쪽 해안에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공방전 초기이기는 했지만, 제노바의 함선 3척과 크레타에서 군량을 구입하고 돌아가던 동로마 함선 1척 등 4척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도 했다. 물론 오스만 요새의 대포에 맞아 적잖은 타격을 입었겠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인 상태는 아니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사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인 베네치아[* 다만 유럽 강대국들에 비해 작았다 뿐이지 만단위는 쉽게 동원할 역량이 있었다. 이탈리아 본토 인구만 해도 2백만을 넘었다.]는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참가했다고 해서 베네치아 혼자서 로마의 멸망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그저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 그나마도 직접 지배가 아니라 황족이 다스리는 신하국 영토였다.]만으로 [[오스만 술탄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불안한 상태였다. 장기적으로 로마의 멸망을 막으려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협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서유럽은 동유럽에 눈을 돌릴 상황이 되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베네치아는 일단은 동로마 제국 시절의 무역특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하게 되면서 이 특권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적은 영토를 가지고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를 예로 들면, 오스만의 30척 함선이 제노바와 동로마 함선 4척을 상대로 쩔쩔 맨 끝에 패한 일도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 ^^(1512년 ~ 1520년)^^에 오스만이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며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진다.[* 다만 베네치아는 말이 [[도시 국가]]지, 당시 기준으로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었다. 영토도 일반적인 도시 국가에 비하면 컸고, 인구도 [[1557년]]에는 215만 명에 달해 역시 무척이나 많았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답게 도시화율도 엄청나게 높았다.] 1463년 오스만 제국은 [[아테네]]의 튀르크인 지휘관에게 속해 있던 [[알바니아인]] 노예가 베네치아령으로 도망간 사건을 빌미로 베네치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백양 왕조]]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에 대항하였으나, 육지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는 오스만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네그로폰테와 모레아, 알바니아 일대가 오스만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패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네그로폰테와 렘노스, 알바니고, 달마티아 일대를 오스만에게 넘긴 베네치아는 배상금과 연공까지 지불하기로 했다. 1499년 오스만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걸어왔다. 케말 레이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의 맹활약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베네치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1503년 오스만과 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의 거점인 [[두러스|두라초]], 그리고 모레아 반도의 코론과 모돈을 오스만에게 할양하였다. 이렇게 베네치아는 [[십자군|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 === [[이탈리아 반도]] 북부 진출 === 베네치아는 제노바와의 전쟁 이후 도제 미켈레 스테노의 정책아래 육상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 트레비소(1389년)를 시작으로, [[베로나]](1405년), [[파도바]](1405련), [[롬바르디아]]의 [[브레시아]](1426년), 베르가모(1428년)까지 진출하여 밀라노 공국과 접하게되었으며, 16세기 이후 해상 영토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진출 방향을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돌려 베로나, 파도바 지역을 [[베네토]]로 칭하고 볼로냐 등 로마냐 지역에 베네치아 속령을 설치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에게 [[볼로냐]] 지역의 반환을 통보했으나 베네치아는 거절하였고 갈등이 촉발되었다. 1508년 12월에 교황이 주도하여 프랑스,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과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면서 베네치아를 압박했다. 율리오 2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 [[프랑스 왕국|프랑스]]를 끌어들여 결성한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이탈리아의 영토를 다 토해냈다. 그후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세력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은 베네치아는 1515년에 이르러 아냐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북이탈리아에서 더 이상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는 못 했다. === 몰락 ===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이스탄불|코스탄티니예]] 무역 경로를 독점하게 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독점 패권을 잃게 되고, 16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무역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간 베네치아가 독점해오던 향료가 포르투갈에 의해 더 싼 가격으로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1521년]]에는 포르투갈에게 그 향료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향신료가 유럽에서 부와 패권을 좌지우지했던 시대에서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것은 '''포르투갈에게 부와 패권을 도로 내놓으라'''는 의미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미쳤다고 자신들에게 온 부와 패권을 베네치아에게 넘겨줄리가 없고, 자기들이 그냥 팔면 되는 걸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시작한 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은 다시 증가했다. 포르투갈 측 첩보 문서에 그냥 인도를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라는 효율적인 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범선 시대에 아프리카를 왕복해야 하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았던 만큼, 동지중해 무역은 여전히 수익성이 있었다.[* 다만 베네치아가 오스만이랑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중이라...]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여전히 매우 강했고, 갤리가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제국|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영토면에서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하면서 레판토에서 오스만의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고'''[*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에게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한 말에서 인용. 다만 그는 본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데다 레판토에서 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관료들이 있었기에, 본심보다 조금 강경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가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나폴리는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파견한 부왕(副王), 즉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사실상 스페인 영토였다. 그리고 신성동맹을 결성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리와의 사이도 틀어지는 게 당연지사.]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당연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어 진출을 방해하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는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점점 고립되어가던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후 베네치아는 예전의 부와 힘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6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만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격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의 부국답게 엄청난 보급으로 치열하게 항쟁했다.[* 이때 베네치아측 사상자는 3 ~ 6만, 오스만측 사상자는 무려 12 ~ 24만에 달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 프란치스코 모로시니 ^^(1619년 ~ 1694년)^^가 1669년에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자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자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모로시니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패배하자 결성된 [[신성 동맹]]에 베네치아가 참가하자 복귀, 베네치아군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오스만군과 싸웠으며 1688년에 도제로 선출되었고 1694년에 사망했다. 1699년에 신성 동맹이 승리하면서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수복하지 못했지만 보상으로 모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와 일부 영토를 오스만에게 할양받았다. 그 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다시 오스만에게 잃었지만 본토 속령[* 본토를 제외한 이탈리아 지역을 말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토는 어디까지나 섬이었다.]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고,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결정타는 당시 불었던 태풍으로 오스만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퇴각하게 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 후, 극강의 방어력을 보여준 코르푸 섬의 요새는 낙뢰가 화약고 위로 떨어져 대파되고 만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8세기 베네치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비발디]]의 전기를 보면 비발디가 활약하던 당시의 베네치아는 쇠퇴 국면에 처해 있었다는 표현이 굉장히 많다. 17세기 이후로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고아가 급증했고, 천주교 사제 시절 비발디의 주 업무가 이런 고아들을 돌보면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 멸망과 그 이후 === ==== 멸망 후의 베네치아 ====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제가 된 [[https://en.wikipedia.org/wiki/Ludovico_Manin|루도비코 마닌]]은 오스트리아를 따라 대불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자 1797년 당시 북이탈리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결국 베네치아의 이탈리아 반도 쪽 영토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자, 마닌과 베네치아 정부가 항복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 [*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에 입성할 때,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 (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함한 라인 강 서쪽의 [[신성 로마 제국]] 영토를 얻고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과 [[리구레 공화국]]을 세우는 대신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대부분을 합스부르크 제국에 할양했다.[* 단,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중 [[브레시아]]는 치살피나 공화국에,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에게 할양되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합스부르크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멸망할 당시였던 1800년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000명으로 과거보다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인구였다. 이후 1805년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박살내고 체결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다시 베네치아를 넘겨받아 [[이탈리아 왕국(나폴레옹)|이탈리아 왕국]]에 편입시켰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롬바르도-베네토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1848년에 다니엘레 마닌이 [[1848년 혁명]]을 기회삼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마닌은 사후 베네치아 시에 동상이 세워졌다.] 1866년 신생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양되었다. ==== 멸망 후의 베네치아 해군 ==== 멸망 당시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전성기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해서, 전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함선이라곤 갤리선 7척을 포함한 11척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이 압류한 함선이라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프리깃 2척이 전부였다. 이 프리깃 2척은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국으로 탈출할 때 사용한 선박이기도 하다. 남은 해군 인프라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고스란히 흡수하여 [[황제군]] 해군을 만드는 데 써먹는다. 황제군 해군은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되어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똑같이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셈이다.[* 반면 오스트리아 해군과 경쟁하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과거 베네치아와 경쟁하던 [[제노바 공화국]] 해군을 기반으로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1815년 [[사르데냐 왕국]]이 제노바를 집어먹곤 그 인프라로 사르데냐 해군을 세웠고, [[이탈리아 통일]] 때 [[양시칠리아 왕국]] 해군까지 흡수해 만들어진 것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다.]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은 이름만 오스트리아 해군이었을 뿐, 절대 다수가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함선들과 베네치아인 장교, 베네치아인 선원들로 구성되었다. 제국 해군에 짙게 남았던 베네치아의 유산은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해군 내에서 잠재적 위험요소인 이탈리아계에 대한 [[숙군]]과 [[독일]]화의 바람이 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거되기 시작했고, 1866년 이탈리아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탈환할 때 같이 이탈리아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해군 내에는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와 [[달마티아 왕국]] 출신 이탈리아계 장병들이 상당히 많았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리사 해전 당시에도 제국 해군은 [[베네토어]]로 명령을 내리고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베네치아인 == 베네치아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라이벌이었던 [[제노바 공화국]]이 쇠락하면서 [[코르시카]] 섬을 프랑스에 넘길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이라며 그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코르시카 섬을 팔아치운 제노바도, 그리고 그 제노바를 비웃은 베네치아도 나란히 프랑스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것도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장군이 된 나폴레옹에 의해.] 그런 이유로 달마티아인[* 앞서 언급했듣이 달마티아 공작을 겸임한 도제의 특성상 달마티아인을 차별한다면 그건 자아부정에 가까울 것이다. [[자다르]]를 비롯해 달마티아 해안지역은 비교적 일찍 베네치아에 편입되었다.]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의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키프로스인이 몰래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에게 찾아가 키프로스를 정복해 달라 요청했고, 키프로스가 함락당할 때 기독교도들이었던 키프로스인들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군을 환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상 [[노예]] 제도에 가까웠으며, 키프로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크레타나 모레아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활용은 했지만 민심은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다.] 이 차별은 식민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섬 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했고, 이때문에 후기에 가서는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본토 출신의 귀족이 도제가 되자 망조라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인들의 우월주의는 이와 같이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애국심]] 덕분에 키오자 전투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에 돈을 기부하고 군에 입대해 결국 승리한 경우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도시내에서도 차별이 심했는데, 도시 거주자중 실제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10%도 안되었고, 다수는 외국인 노동자나 [[노예]]였다. 그 위에는 주변 지역이나 외국에서 이주해온 상공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독일계 이민자들은 주로 베네치아의 모직 작업장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 위에는 관료로 선출될 수 있는 소수의 시민권자들이 존재했다. 계급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베네치아의 핵심 가문들이 모여 만든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가 자리했으며, 이 대평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일부 가문에 제한돼 상속되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3% 정도인 소수였다. 악명높은 [[유대인]] [[게토]]도 베네치아가 원조였다. [[오스만 제국]]과 오랜 세월동안 대립관계였지만 오스만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베네치아 출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셀림 2세]]의 애첩인 누르바누 술탄[*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베네치아의 국가원수로 선출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혈육이라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부리는 [[해적]]들이 납치한 것이라, 누르바누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세바스티아노가 관여한 바는 없었다.]과 무라트 3세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이들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누르바누의 경우 유대계라는 주장도 있는데다가 사피예는 알바니아 출신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누르바누는 기록에 따라 베네치아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하며, 사피예의 경우, 확실히 친베네치아적이어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이 여자를 잘 구슬리면 우리 공화국에 유리할 듯 합니다."라는 식의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공화국의 재기를 주장하는 정당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을 원하는 주민의 수가 [[무려]] 89%라고 한다. 위 투표는 온라인 투표라서 실제 여론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베네토 지역이 다른 북부 지역에 비해서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경제난이 심화되어 주민들의 반발이 현재보다 과격해진다면 몇 세기만에 부활하는 공화국을 볼 지도 모를 일이다. == 정치 체제 및 [[조직]] ==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유력 인사들 간의 [[집단지도체제]]인 [[과두제|과두 공화정]], [[귀족공화정|귀족 공화정]]이었다. 몇몇 가문들이 시민을 대표한다는 명분 아래 뭉쳐 사실상 지들끼리 해먹는 시스템이었지만, 그들끼리도 정치적 파벌이 존재했기에 오늘날로 굳이 비유하자면 당내 민주주의 비슷한 체계는 돌아가던 [[시스템]]인 셈이었다. --중세판 [[민주집중제]]?-- 또 명색이 '[[공화국]]' 이라는 간판을 건 이상[* [[공화국]]이라는 말에서 군주의 부재는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다만 군주를 두고 공화정을 지향한 국가도 있다]]--], 베네치아는 이념적으로는 '''도시를 시민들의 공공재산'''으로 여겼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현실은 소수의 가문이 통치하는 [[과두정]]적 요소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념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 (최소한 당시의 기준으로는 '많은') [[정부]]와 [[주권]]에 대한 참여를 지향하는 체제'''이긴 했다. '''대공의회'''(Mazor Consegio)의 회원들이 투표를 통해 국가원수인 [[베네치아 도제]]를 선출했으며, 일단 선출된 도제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국가의 최고 [[권력]]은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임기 1년의 위원 10명으로 구성되는 '''10인 위원회'''(Consejo de i Diexe)에 있었으며, 도제도 10인 위원회 내에서는 다른 위원들과 동등하게 단 1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제55대 도제인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6%AC%EB%85%B8_%ED%8C%94%EB%A6%AC%EC%97%90%EB%A1%9C|마리노 팔리에로]]는 1355년 4월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10인 위원회에게 [[체포]]되어 도제 직을 박탈당하고 [[사형]]당했다. 이러한 정치형태로 인해 [[피렌체 공화국]]처럼 [[메디치 가문|특정 가문]]이 사실상 도시 권력을 장악하는 --유사-- 공화국이 출현했을 때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정을 유지했다. '''시뇨리아'''(Serenissima Signoria) 역시 국가 권력의 중추를 담당했다. 오죽했으면 도제의 장례식날에서조차 공화국 시민들이 상복도 입지 않고 도제는 죽었지만 시뇨리아는 살아있다며 노래할 정도였다. 이 시뇨리아는 10인 위원회와는 별개로,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40인 위원회의 지도자 3인으로 구성되어 대평의회에서 10인 위원회의 위원 10명과 함께 총 20개의 권좌에 도제를 중심으로 앉아 대평의회를 주도했다. 베네치아 도제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실제로 8세기 ~ 9세기까지 베네치아는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위성 국가]]였으나, 9세기 이후 아랍과 노르만의 침입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동로마 거점들이 무너지자 베네치아는 명목상의 봉신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위는 베네치아가 [[서유럽]] 세력[*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 등.]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지키는 적당한 명분은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상업을 통해 이룬 재력과 군사력 및 서유럽 최고의 외교력으로 이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부 조직에는 위의 대공의회와 10인 위원회 및 시뇨리아 외에도 다양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행정조직들이 있었다. 여타 중세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조직들 또한 중세 중기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신설되기 시작했다. [[https://it.wikipedia.org/wiki/Governo_della_Repubblica_di_Venezia|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 무역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베네치아 공화국/무역)] == 여담 == *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이자 [[로마 제국]] 빠순이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 다음으로 빠심을 드러내는(즉, 편애하는) 국가로,《[[바다의 도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공화국의 통사를 쓴 적도 있다. 또한 다른 중세 지중해 관련 책에서도 베네치아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러니까 많이 [[필터링]]해서 읽자. * 진지하게 베네치아사를 읽고 싶다면 존스홉킨스 대학의 F. C. Lane 교수가 쓴 《Venice: A Maritime Republic》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내용도 한 권에 베네치아사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흠이라면 [[한국어]]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것과 페이퍼백판은 인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 <[[문명 5]]>의 확장판 멋진 신세계에서 최초의 플레이어블 도시국가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명 5/등장 문명/베네치아|문서 참조]]. * [[코에이]]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7대 국가(선택 6+[[오스만 투르크|망명 1]]) 중 하나지만, 문제는 그 위치가 구석인데다 아드리아 해의 영원한 역풍 때문에 유저 수가 극히 적다. 자세한 내용은 [[베네치아(대항해시대 온라인)|해당 문서]] 참조. 그리고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는 자유항으로 전락, 베네치아 공화국이 없다. *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 성인은 복음 사가 [[마르코]]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당시 성 마르코의 유해는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유해를 돼지고기 사이에 숨겨서 밀수해 왔고, 그 이후 성 마르코에게 봉헌된 [[산 마르코 대성당]]이 지어졌다.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의 상징 역시 성 마르코의 상징인 사자로 정해졌다. * 1104년 경에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 영어식으로는 '''아스날 오브 베니스''', 즉 '베네치아의 병기창'이라는 뜻이다.]라는 지금으로 치면 군수 조선 복합산업단지라고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운영했다. 이곳을 통해 베네치아는 함선과 무기의 규격화, 표준화 등을 이룩했다. <문명 6>에 [[문명 6/불가사의#s-5.4.1|베네치아군수창고]]라는 이름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이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는 오늘날에는 이탈리아 해군 기지와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장, 고선박 보존 시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 1585년 베네치아 공화국을 방문한 [[일본인]]들도 있다. [[덴쇼 소년사절단]] 문서 참조. * 대체역사물에서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주범+원 역사의 승리자 포지션이라는 위치를 담당해서인지 좋은 꼴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동로마를 다시 위대하게|동로마에 역으로 당해 흡수당해버린다던지]], [[롬연시|줄을 잘못 서서 멸망만 피했지 사실상 도시국가도 아닌 일개 소도시로 전락한다던지]] 아니면 몽골이나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제3자에게 멸망당하거나 코가 꿰이던지... 그나마 [[동롬회귀]]나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죽왕]], [[임꺽정은 살아있다]]처럼 수혜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는 아예 싸그리 털어버리고 섬을 이루는 나무 기둥들까지 뽑히며 완벽하게 삭제당했다. * 현재의 베네토 주와 베네치아 시의 상징은 베네치아 공화국때부터 내려온 '성 마르코의 사자'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성 마르코의 유골을 모셔와[* 현재 기준으로는 도굴이 맞다. 하지만 당대에는 이민족에게 훼손되어가는 성자의 유물을 몰래라도 옮겨오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부를 한껏 자랑하며 지은-- [[산마르코 대성당]]에 안치하고, 그 후 성 마르코를 공화국의 수호성인으로 모시며, 그의 상징인 사자를 도시 곳곳에 세웠다. 헌데 여기서 단순히 유해를 모셔온 것으로 도시의 자랑을 삼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조금 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있는데... [[총대주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방의 정교회에 4명의 총대주교좌가 있고, 서방의 가톨릭에는 1명의 총대주교좌, 즉 로마 교황이 있다. 하지만 서방의 가톨릭에도 명목상의 총대주교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https://en.wikipedia.org/wiki/Patriarch_of_Venice|베네치아 총대주교]]이다.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생기게 된 배경을 파고 들어가면, 베네치아 근방의 [[아퀼레이아]]라는 고대 도시가 있는데, 여기가 지금은 별볼일 없어보여도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제국 내 5대 도시, 이탈리아 반도 한정 2대 도시에 버금가는 대도시였다. 그러던 중 6세기 경 아퀼레이아와 이스트리아 반도 일대의 주교들이 로마와 [[단성론]] 문제로 불화를 겪으면서 아퀼레이아 대주교가 총대주교를 자칭하게 되었다. 이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에 [[랑고바르드족]]이 쳐들어오자, 아퀼레이아 시민과 총대주교는 [[트리에스테]] 앞바다의 작은 섬 그라도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때 다시 그라도 총대주교가 생기기도 한다.] 이후 8세기 경 이탈리아의 권력자들에 의해 로마와 화해를 하고, 로마 교황이 화해의 의미로 교황의 상징인 '팔리움'(Pallium)을 건네게 되면서 상징적으로 총대주교좌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는 그라도 총대주교가 되었다가, 이미 잊혀진 고대 도시와 임시방편의 피신지였던 작은 섬마을에서 벗어나 일대의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가 된 베네치아에 총대주교좌를 옮기게 되었다. 당연히 총대주교좌 성당은 베네치아의 명물인 산 마르코 대성당이었다. 이렇게 해서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아직도 명예직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은, 아퀼레이아에 처음 교회를 만든 이가 성 마르코이고, 베네치아를 처음 세운 이들은 랑고바르드족에게 쫓겨 도망친 아퀼레이아 유민들이었다는 것이다. 동•서 가톨릭 5대 총대주교 중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초대 주교가 성 마르코라고 알려져있는데, 그 유해가 알렉산드리아에 모셔져 있다가, 베네치아로 옮겨져 왔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을 지었는데, 거기에 성 마르코가 또 달리 세운 교회에서 내려온 (명목상) 총대주교좌가 그 대성당으로 온 셈이다. 그리고 베네치아 총대주교좌의 성도들은, 마르코가 이탈리아 반도에 세운 초기 교회 성자들의 후손들이고. 이 사실을 아마도 알고있었던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이 목숨을 걸고 성유물을 훔쳐서라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예상된다. == 연표 == ||425년 [[베네치아]] 건설[br]697년 건국 ([[베네치아 도제]] 선출)[br][[742년]] 말라모코 천도[* 원래 중심지는 헤라클레아][br][[810년]] 프랑크 왕국 vs 동로마 제국[br][[828년]] 성 마르코 유해 밀반입[br][[887년]] 나렌테[* 크로아티아계 슬라브 해양 세력]에 패배, [[아드리아 해]] 통행료 납부[br][[996년]] 연공 납부 중단[br][[1000년]] 나렌테 격파, [[아드리아해]] 장악[br][[1082년]] [[알렉시오스 1세]]의 <[[금인칙서]]>[* 콘스탄티노플의 무역 특권 장악], 무역특권[br][[1099년]] [[산 마르코 대성당]] 축성[br][[1104년]] 무기고 건설[br][[1110년]] [[십자군 전쟁]] 참전[br][[1117년]] [[헝가리 왕국]]에게 [[달마티아]] 상실[* 1171년에 회복][br][[1171년]] [[마누일 1세]]의 베네치아 상인 추방, 전쟁[br][[1182년]]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인 학살[br][[1202년]] [[4차 십자군]], 자라 함락[br][[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br][[1211년]] [[크레타]] 획득[br][[1256년]] ~ [[1270년]] 1차 제노바 전쟁 (승리)[br][[1271년]] [[마르코 폴로]]의 여행 (~ 1295년)[br][[1284년]] [[두카트]] 금화 주조 시작, 2차 제노바 전쟁 (~ 1299년, 무승부)[br][[1298년]] 쿠르촐라 해전[br][[1310년]] 10인 위원회 발족[br][[1348년]] [[흑사병]][br][[1350년]] ~ [[1355년]] 3차 제노바 전쟁[br][[1377년]] ~ [[1381년]] 4차 제노바 전쟁[br][[1380년]] 키오자 해전[br][[1386년]] [[코르푸]] 획득[br][[1405년]] [[베로나]], 비첸차, [[파두아]] 획득[br][[1409년]] [[달마티아]] 획득 [br][[1420년]] [[아퀼레이아]], [[두라초]] 획득[br][[1426년]] [[브레시아]] 획득[br][[1453년]] [[동로마 제국]] 멸망[br][[1454년]] 로디 평화조약 [br][[1463년]] ~ [[1479년]] 1차 튀르크 전쟁[br][[1470년]] 네그로폰테([[에우보이아]]) 상실[br][[1489년]] [[키프로스]] 획득[br][[1495년]] [[브린디시]], 오트란토 등 아풀리아 해안 획득[* ~ 1530년][br][[1499년]] [[크레모나]] 획득, 2차 튀르크 전쟁 (~ 1503년)[br][[1509년]] 아그나델로 전투[br][[1514년]] 리알토 대화재[br][[1534년]] [[프레베자 해전]][br][[1537년]] ~ [[1540년]] 3차 튀르크 전쟁 [br][[1569년]] 5개 은행 파산, 무기고 화재[br][[1570년]] ~ [[1573년]] 4차 튀르크 전쟁[br][[1571년]] 키프로스 상실, [[레판토 해전]][br][[1575년]] ~ [[1577년]] 역병[br][[1591년]] 리알토 다리 완공[br][[1605년]] 성무중지령[* ~ 1606년][br][[1615년]] ~ [[1617년]] 우즈코키 해적과의 전쟁[br][[1630년]] ~ [[1631년]] 역병[br][[1645년]] ~ [[1669년]] 5차 튀르크 전쟁[br][[1669년]] 크레타 상실[br][[1684년]] ~ [[1699년]] 6차 튀르크 전쟁[br][[1687년]] 모레아 재정복, [[아테네]] 일시 점령[br][[1714년]] ~ [[1718년]] 7차 튀르크 전쟁[br][[1715년]] 모레아 상실[br][[1785년]] ~ [[1786년]] 바르바리 해적 소탕전[br][[1796년]] 비첸차 등 육지 영토 상실[br]1797년 [[나폴레옹]]의 진군, 멸망 (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