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경순왕의 왕자[br]{{{+1 범공 | 梵空}}}'''}}} || ||<|2> '''출생''' ||[[918년]] 이후(추정)[* 족보상 경순왕은 897년생이고 마의태자는 917년생이다. 삼국사절요에 의하면 부모의 혼인시점이 897년이므로 대략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면 계자인 범공은 마의태자 출생 후 1년이 지난 918년 이후에 출생했을 것이다.] || ||[[신라/후삼국시대|신라]] [[서라벌|금성]] || ||<|2> '''사망''' ||연대 미상 || ||해인사[*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처자를 버리고 해인사에 들어가 살다 죽었다고 한다.] || ||<|2> '''재위기간''' ||'''{{{#fbe673 신라의 왕자}}}''' || ||? ~ [[936년]] 1월[* 음력 935년 12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 || || '''휘''' ||? || || '''부모''' ||부왕: [[경순왕]][br]모후: [[죽방부인]] || || '''형제''' ||형: [[마의태자]][br]누이: 덕주공주[* 德周公主.] || || '''법명''' ||'''범공(梵空)''' || || '''골품''' ||[[진골]](眞骨) ||}}}}}}}}} || [목차] [clearfix] == 개요 == [[통일신라]]의 제56대 [[경순왕]]의 계자(季子)[* 신라가 고려에 합병될 당시에 경순왕의 막내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은 고려에 귀순한 후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 왕씨]]와 혼인하여 자녀를 더 갖게 된다.]로 [[신라]] 말기의 왕족이자 [[고려]] 초기의 승려이다. 출가 이전 왕족 시기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경순왕]]의 장남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지금 전하는 [[마의태자]]라는 이름도 일제강점기인 [[1926년]] 동아일보 연재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 생애 == >太子哭泣辭王, 徑徃皆骨山麻衣草食以終其身. >[[태자]]는 왕에게 울면서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생애를 마쳤다. >季子祝髮隷華嚴為浮圖名梵空, 後住法水海印寺云. >'''계자(막내 아들)는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이름을 범공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 >《삼국유사》 제2기이 김부대왕 中, 마의태자와 범공에 대한 언급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첫 기록은 [[고려]] 말기인 [[1281년]]에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935년]] 음력 11월 [[신라]]가 [[고려]]에게 항복한 뒤, 형인 [[마의태자]]는 [[경순왕]]에게 하직한 후 바로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이후 법수사(法水寺)[* 현 [[경상북도]] [[성주군]]의 [[가야산]]에 있었던 사찰. 현재 절은 남아있지 않고 석탑만 남아 있는데, 임진왜란 전후로 불에 타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인사]][* 현 [[경상남도]] [[합천군]]에 위치한 사찰. [[팔만대장경]]이 이곳에 보관된 것으로 유명하다.]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동국여지승람》 범공에 대한 언급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가 중이 되어 법수사에 들어가 이곳 [[해인사]]에도 드나들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 >《해인사지》 범공에 대한 언급[* 《해인사지》어느 부분인지 출처 필요.] == 문헌상 기록 == * 《[[삼국유사]]》(1281, 일연)에서는 [[경순왕]]의 계자(季子)가 신라 멸망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해인사에 머물다 죽었다고 한다. * 《하서 김인후 가장》(1561, 양자징[* 석성현감. 호는 고암.])에서 경순왕의 왕자를 김덕지(金德摯)라 하였다. 여기서 처음 김덕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김덕지는 [[울산 김씨]]의 시조이다. *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1682, 송시열)에서는 경순왕의 별자(別子)가 김덕지로 학성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하였다. * 《[[증보문헌비고]]》(1908, [[칙령|칙명]])에서는 경순왕의 계자 범공이 해인사에 들어가기 전에 김운발(金雲發)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분적하여 [[나주 김씨]] 시조가 되었고, 경순왕의 별자 김덕지가 분적하여 [[울산 김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울산 김씨]] 족보에서는 시조 김덕지를 범공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 평가 == * 범공은 형 [[마의태자]]와 함께 [[신라]]가 망할 때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로 꼽힌다. *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킨 범공의 행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 기타 == * [[울산광역시]]의 남암산에 위치한 김신대(金信臺) 설화에 의하면 승려가 된 범공이 말년에 세운 김신암(金信庵)이라는 절에서 유래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동고사에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 덕지 왕자가 범공이란 스님이 되어 도를 닦으며 부왕과 어머니, [[마의태자]] 등 5인의 상을 목각으로 조성하여 이 절에 봉안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김부대왕절', '진불대왕절'이라 불렀다. *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형인 마의태자와 달리 미등장했다. == 관련문서 == * [[경순왕]] * [[마의태자]] [[분류:신라의 왕족]][[분류:후삼국시대/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