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반란 [[군인]](前 육군 중장). 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의 일원으로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 생애 == 1932년 12월 24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4년제 정규 교육과정 첫 기수인 11기로 입학해 1955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생도 시절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정호용]], 최성택, [[권익현]] 등 경상도 출신 11기 생도들과 함께 불법 사조직 [[하나회]]~~~반란군~~~를 만들었다. 졸업 즈음 육군본부 방침 하에 6.25전쟁에서 고생한 육사 단기 교육과정 선배 기수들에게도 육사 기수가 인정되어 부여되었다. 본래 '육사 1기'여야할 기수가 '육사 11기'로 바뀌게 되자 동기 [[김성진(1931년 11월)|김성진]]과 함께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항의하다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사실 어처구니 없는 일인게, 육사 단기 교육과정 선배들은 11기가 후방에서 편하게 교육받을 때 6.25 전쟁에서 피땀흘려가며 싸우고 죽어갔다. 거기다 원래는 육사 10기를 본래 정규과정 첫 기수로 모집했으나 여러 사정상 1년제로 바뀌었고, 그 다음 기수를 진짜 4년제 첫 기수로 뽑았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장으로 총알받이 신세로 끌려갔다. 다음 기수로 뽑힌 11기는 선배들이 죽어나갈 때 전쟁 중에 교육이나 받는 꿀빠는 신세였다. 싹수가 얼마나 노란지 알 수 있는 일. 그럼에도 육사 11기 이하는 선배들을 무시하고, 본인들에 대한 프라이드가 어마어마하게 높았고 이는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진다. 여담으로 정규과정 첫 기수가 확실했으나 전쟁 발발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끌려나간 이른바 '생도 2기'는 육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육사 기수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는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졸업 기수로 인정하고 있다.] 11기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한 [[손영길]][* [[전두환]]보다도 [[박정희]] 전속 부관 출신인 손영길이 본래 11기 최고 실세로 차기 육군참모총장 1순위였다. 그러나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날아가버린다. 손영길 낙마 배후에는 [[전두환]]이 기여했다는 것이 정설.],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이나 2차 진급자로 경력을 쌓아가던 [[노태우]], [[정호용]]과 달리 같은 하나회 내에서도 백운택은 잘 나가지 못했다. 박정희의 신임 아래 하나회 동기들이 11기 내 진급 서열을 장악[*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이 전원 하나회고 2차 진급자 4명 중 2명이 하나회였다. 1/2차 진급자 8명 중에 6명이 하나회란 소리.]했음에도 백운택은 선두 대열은 커녕 2차 진급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1979년 말 당시만 해도 이미 사단장을 마치고 소장 2차 보직을 수행중인 [[전두환]]/[[김복동]]/최성택, 그리고 사단장으로 재임중이었던 [[노태우]], [[정호용]]에 비해 백운택은 소장 진급도 못하고 제71방위사단[* [[2016년]] 말 해체된 [[제71보병사단]]의 모체.]장이라는 [[한직]]에 있었고, 이변이 없으면 준장으로 옷 벗을 일만 남아있었다. 이에 백운택은 [[12.12 군사반란]]에 기획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백운택은 [[12.12 군사반란]] 실행 이전 모의 단계부터 반란에 가담했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없었지만 반란군들의 [[최규하]] 대통령 면담 때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면담 중 일부러 권총을 떨어뜨려 최 대통령을 겁박했다고 하나, 면담 자리에 최규하 대통령과 같이 배석해 있었던 [[신현확]] 총리는 신군부 인사들이 그런 행동은 하지는 않았다고 5.18 때 검찰에 진술했다. 군용 점퍼 안에 권총을 숨겼을 지는 몰라도 겉으론 안 드러났다고 진술했는데, 신현확 총리가 [[12.12 군사반란]]을 법질서를 무시한 행위라며 신군부를 비판했던 점을 볼 때 일부러 백운택을 두둔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백운택의 권총 위협설은 일종의 낭설이라는 주장. 어찌되었든 반란에 적극 가담한 덕분에 [[노태우]]가 수도경비사령관이 되면서 공석이 된 [[제9보병사단]]장[* 9사단장은 전통적으로 요직이다. 군사 정권에서도 [[전방]] [[메이커 사단]]이면서도 유사시 서울로 동원이 가능~~~노태우가 반란 때 전방 병력 빼돌리면서 본보기를 보여줌~~~하기 때문에 요직으로 분류되어 하나회가 거의 독점했다.]을 차지하며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했다. 사단장 이후에는 정보사령관을 역임하고 소장 진급 2년 6개월만인 82년 6월 [[중장]]으로 진급한 뒤 야전 군단장 중 제일 [[요직]]인 [[제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1군단장 재직 중이던 1982년 11월 3일 향년 49세에 [[사망]]했다. 전두환의 직계[* 집권 이전에는 전두환과 대등한 친구 관계였던 다른 11기 하나회들과는 달리 백운택은 생도 시절부터 전두환을 '형님'이라 불렀다.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다른 하나회 동기들(대표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김복동]])은 전두환이 집권하자 의도적으로 참모총장으로 키운 [[정호용]]을 제외하고 실권을 누리는 일 없이 옷을 벗어야했다.]에 나름 요직들을 역임해서 대장 진급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이미 백운택이 소장 진급부터 선두보다 3년이나 늦어 반란 이후 광속 진급한후에도, 이미 대장으로 진급한 [[정호용]]을 제외해도 1년 앞서간 [[이상훈(육군)|이상훈]], [[이기백(군인)|이기백]]을 따라잡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훗날 반란군을 단죄한 [[역사바로세우기]] 당시 [[공소권 없음|공소권이 없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하나회 중심 멤버라면 못해도 중장은 찍고 퇴임 후에도 장관, 국회의원, 공공기관장으로 오른 경우가 많았으니 오래 살았다면 승승장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에 안 죽었다면 아마 다른 쿠데타를 일으킨 일원들과 같이 단죄를 받았다가 사면받고 전두환이나 노태우, 박희도 등 12.12의 주도자들과 같이 살다가 죽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 여담 == * 전두환을 생도 시절부터 친구가 아닌 형님이라고 불렀다. 반란 이전에는 대등한 친구 관계였던 다른 하나회 11기 동기들과 달리 일찍부터 전두환 줄을 탄 것으로 보인다. * 본인 주장에 의하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전두환]]에게 시민군이 [[전라남도청]]을 점거중이던 [[광주광역시]]에 보내달라고 자청했으나 전두환이 말렸다고 한다. 시민군과 만나 가슴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잘될 경우 설득하고, 안될경우 자신이 죽어 진압군에 명분을 주겠다며 자신의 목숨을 걸려고 했다고 한다. 본인의 주장이니 걸러 들어야할 일이다. * [[12.12 군사반란]] 다음날, 반란군이 보안사령부 앞에서 모여서 찍은 기념 사진에 백운택은 맨 뒷줄 구석에 유독 주변과 어색하게 찍혀 있는데 본인 부재중에 사진을 찍어서 본인 부분은 나중에 합성해달라고 했단다.[* 여담으로 사진에 같이 찍혀있는 [[박준병]] 20사단장도 합성으로 들어간거다. ~~~사진을 잘 보면 앞에 있는 이상규 2기갑여단장이 앉아있는 의자 뒷편에 박준병의 다리가 없다.~~~ 1996년 12.12 재판 당시 검찰 측은 기념 사진을 증거로 들어 박준병의 반란 가담을 주장했으나 이후 합성으로 밝혀졌고, 그 외에 하나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병력 동원 요청을 거부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 대중매체에서 ==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는 성우 [[김강산]]이 연기했다.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송용태]]가 연기했다.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영화)|서울의 봄]]에서는 배우 [[권혁(1975)|권혁]]이 연기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12.12 군사반란 가담자)] [include(틀:제1군단장)] [include(틀:제9보병사단장)]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1932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하나회]][[분류:수원 백씨]][[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