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48년 출생]][[분류:1933년 사망]][[분류:수원시 출신 인물]] [include(틀:토막글)] ||||
[br]{{{+1 '''백선행''' }}}[br] Baek Seon Haeng | 白善行 || ||||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width=300]] || ||<|2> '''출생''' ||[[1848년]] || ||[[파일:조선 어기.svg|width=30]] [[조선]] [[경기도]] [[수원]] || ||<|2> '''사망''' ||[[1933년]]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30]] [[평양부]] [[중성동(평양)|중성동]] || || '''가족''' ||아버지 백지용 || || '''종교''' ||무교 || || '''직업''' ||기업가, 사회적 기업가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사회적 기업가. == 생애 == 조선 말기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수원시이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평양시 중성동에서 살았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16살 때는 남편 안재욱과 사별하게 되었다. 이후 사업가 수완이 뛰어났는지,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평양의 대부호가 되었다. 평양 만달산 부지를 시멘트 공장부지로 팔아서 갑부가 된 사연은 유명하다. 1908년에는 환갑을 기념하여, 대동군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백선교를 건설하였다. 1919년 3월 1일 운동에 충격을 받고, 본인의 자금을 사회기업에 투자하기로 선언하고, 1924년에는 문화시설인 대공회당을 착공하였다. 대공회당을 건설하는데 조언을 준 사람이 바로 [[조만식]]. 그 외에도 교육사업을 지원하며, 평양에 있는 광성보통학교 및 창덕보통학교에 농지를 희사하고,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도 자금을 지원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훈장을 거절하였으며, 86세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12년 뒤에 조선은 독립을 하게 된다. 백선행이 지은 대공회당은 그녀가 죽자 [[백선행기념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북한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남아 있으며, 북한에서도 백선행은 '애국자본가'라고 높이 평가한다. 다만 그녀가 본래 남한 사람이었다는 건 남,북 어느 쪽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활동한 그녀에 별 관심이 없으며[* 그녀가 태어난 동네인 [[수원]] 남문시장에 조그만 흉상이 세워져 있기는 하다.] 북한에서는 그녀가 평양 중구역에서 태어났다고 왜곡하였다. == 여담 == * 일제강점기의 여성 사회적 기업가라는 매우 특이한 타이틀 때문인지, [[천일야사]] 57회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방영되기도 하였다. [[분류:수원 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