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헌 국회의원/전라북도)]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배헌}}}'''[br]'''裵憲'''}}}}}}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배헌.jpg|width=100%]]}}} || ||<|2> '''출생''' ||[[1896년]] [[4월 27일]] || ||[[전주시|전주부]] [[전주시|전주군]] 남일면 주현리[br](현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0724|#]]] || ||<|2> '''사망''' ||[[1955년]] [[3월 3일]] (향년 58세) || ||[[전라북도]] [[익산시|익산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56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최근에 변절 논란이 일고 있다. == 생애 == 1896년 4월 27일 [[전주시|전주부]] [[전주시|전주군]] 남일면 주현리(현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성취를 목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같은 해 [[http://db.history.go.kr/id/im_106_01438|졸업했다]]. 1924년에 국내로 들어왔고,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現 익산시 [[갈산동(익산)|갈산동]]) 244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541&evntId=0034984956&evntdowngbn=Y&indpnId=000002546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주소지를 옮겼다]]. 1924년 2월 익산군에 [[동아일보사]] 이리지국이 창설되자 총무 겸 [[기자]]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24_02_03_v0003_0790|선임되었다]]. 이후 전북기자대회 및 [[신간회]] 운동에 참여해 신간회의 주의 강령을 고취하는 선전문서를 인쇄해 여러 사람들에게 배포할 것을 기획하고 선전문서를 작성하던 중 체포되어 1927년 8월 31일 이른바 [[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구류 통산 30일)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0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292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1928년 2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다소 감형된 벌금형 50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벌금을 납부하지 않아 50일간 노역장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541&evntId=0034984956&evntdowngbn=Y&indpnId=000002546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유치되었다]]. 출옥 후 수년간 상업에 종사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전라북도상공회의소 부회장, [[익산시청|이리부청]] 정치 고문, 이리중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북도]] 이리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 임기 중이던 1948년 6월 2일 제1회 3차 본회의 당시 [[장기영(1903)|장기영]]·[[전진한]]·[[최윤동]]·[[이원홍(1903)|이원홍]]·[[김약수]]·[[김장열]]·[[정광호(1897)|정광호]]·[[김봉두]]·[[김명동]]·[[성낙서]]·정구삼·[[이유선(정치인)|이유선]]·[[서정희(정치인)|서정희]]·[[윤치영]] 등과 함께 국회기초위원 15인에 선출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이리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춘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3월 3일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별세했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4년 11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 [[제헌 국회]] 활동 == 1948년 6월 8일 제1회 5차 본회의 당시 국회법기초위원회 연락위원 2인에 뽑혔다.[* [[배헌]],[[장기영]] ] 1948년 8월 5일 제1회 40차 국회 본회의 당시 반민처벌법 기초위원으로 뽑혔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북 [[이리시]][* 제3선거구]) || [include(틀:무소속)] || '''6,578표 (41.97%)''' || '''당선 (1위)''' || '''초선'''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이리시]][* 제3선거구]) || [include(틀:대한국민당(1949년))] || 5,541표 (21.85%) || 낙선 (2위) || ||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익산시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제헌 국회의원]][[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신흥무관학교 출신]][[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