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군인]][[분류:1271년 사망]] [include(틀:고려사)] ---- [목차] == 개요 == 裵仲孫(? ~ 1271년) 최후에 외세에 저항한 [[영웅]]이냐 아니면 왕의 명령에 반기를 든 [[역적]]이냐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인물. [[김통정]]과 함께 [[삼별초]]를 이끌었던 지휘관. 3년에 걸친 삼별초 봉기의 발단이 된 사람으로 배중손이 삼별초 봉기의 시작을 알렸다면 김통정은 삼별초 봉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 생애 == === 강화도 철수 === 1270년 5월 15일 [[무신정권]] 최후의 집권자였던 [[임유무]]가 삼별초에 의해 [[살해]]당하고 무신정권이 막을 내린 뒤 23일에 [[몽골]]에서 귀국한 [[원종(고려)|원종]]은 강화도에서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기는 작업(개경 환도)에 착수하였다. 이 때 배중손 및 삼별초들은 [[강화도]]에 있었는데 원종이 개경 환도를 시도하자마자 정책에 반발해 무단으로 창고를 열어 저장된 물품들을 빼앗았다. 원종은 25일 상장군 [[정자여]]를 강화도로 들여보내 삼별초에 대한 회유를 시도하고 29일 장군 [[김지저]]를 보내서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며 삼별초의 해산을 공식 통보했다. 명부를 압수한다는 것에 삼별초들은 "우리 신상을 몽골에 전부 공개하겠다는 거냐"며 분개했고[* 당연히 몽골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맞서 싸운 자들이 곱게 보일 수가 없을 테니까.] 이는 삼별초의 봉기를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원인이 된다. 6월 1일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지휘관) [[노영희]] 등과 함께 봉기했다.[* 당시 삼별초 지유는 노영희로 배중손은 장군이기는 했으나 삼별초의 지휘관이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지는 않았으며 삼별초가 봉기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 역시 배중손이 노영희를 찾아가 봉기하자고 설득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이후 노영희가 사실상 공기화된 반면 배중손은 사실상의 지도자 역할을 했으며 이를 [[원나라]]나 고려 [[조정]] 또한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몽골군이 떼로 몰려 와서 인민을 살육하고 있는데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격구장에 모이라"고 했는데 조금 뒤에 격구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 가운데 배를 타고 강화도를 빠져 나가려던 이들은 잘못해 물에 빠져 죽거나 삼별초의 추격군에 죽었다.[* 물론 참지정사 [[최정]], 추밀부사 [[김현]], 도병마록사 [[강지소]]처럼 육지부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자들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원종에게 마중을 나간 고려 신하(백관)들의 처자들 다수가 삼별초에 잡혔고 그중에서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젊은 여자들은 강제로 [[겁탈]]하여 자신들의 아내로 삼았다. 무기고(금강고)에서 무기를 꺼내 군졸들에게 지급하고 무장을 갖춘 뒤 배중손은 노영희와 함께 저자의 행랑에 모여 [[승화후]] 왕온을[* [[고종(고려)|고종]] 때 몽골에 인질로 간 [[영녕공]] 왕준의 형이었다. 영녕공은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는 몽골에 투항한 반역자인 [[홍다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에는 강성한 군사가 5만명이나 있습니다"라고 쿠빌라이 칸에게 아뢴 것 때문에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진압하고 한창 국가 재건에 힘써야 할 상황에조차 [[일본]] 원정 동원을 명하는 쿠빌라이 칸 앞에서 전쟁 중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고 동원할 군사가 없다고 호소했지만 되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을 받았다.] 왕으로 삼고 대장군 [[유존혁]]과 상서좌승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삼았다. 6월 1일의 일로 모의에 응하지 않았던 장군 [[이백기]]는 몽골에서 온 [[회회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를 지키는 군사들이 많이 육지로 나가서 강화도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삼별초는 6월 3일 선박과 군함을 모으고 재물과 자녀들을 모조리 실어 강화도를 떠나게 된다. 이때 관사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는데, 개경으로 출륙한 주인의 명으로 강화도에 있던 주인의 재산을 정리하러 온 노비들 가운데 삼별초를 따라 남쪽으로 간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분 해방을 꿈꾼 노비들 가운데 삼별초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용혁, <삼별초-무인정권, 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도서출판 혜안, 2014년, 173쪽.] 남쪽으로 내려간 삼별초가 이끄는 배는 1천여 척이나 되었고 이숙진, 윤길보 등이 추격하자 부락산에서 군세를 과시해 도망가게 만들었으며 김방경, 송만호 등의 추격을 받아 [[영흥도]]에 정박했다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다. 삼별초의 강화도 철수는 봉기(5월 23일)에서 출항(6월 3일)까지 빠르게 전개되었는데 원고려기사 지원 7년(1270년) 6월 2일자에 보면 고려의 [[충렬왕|세자 왕심]]이 몽골 조정에서 "반란군(삼별초)이 강화도에 할거하고 있으니 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쿠빌라이 칸에게 아뢰던 그날 고려 조정으로부터 "반란군(삼별초)이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고 하는 [[첩보]]가 날아왔으며 6월 3일자 기사에는 "반란군이 배를 타고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달아나고자 하는 것 같다"고 나온다. 고려사 원종 11년(1270년) 6월 3일조에는 삼별초가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기사에 이어 "전 중서사인 이숙진과 낭장 [[윤길보]] 등이 남은 적을 구포까지 추격해서 부락산에서 군세를 과시해 적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달아났다"고 되어 있는데 6월 3일에는 강화도에서 삼별초가 모두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2일 뒤에 몽골인 관리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몽골인 관리들이 강화도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개경 환도에 따르지 않는 반역자로 간주했다.]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 세력들은 8월 19일에 [[진도군]]에서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강화도와 진도 사이의 거리를 들어 실제로는 6월 하순이나 7월 초에 진도에 들어 왔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 8월 19일의 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윤용혁, 같은 책, 186~187쪽] === 진도 용장성 장악 === 삼별초의 새로운 거점이 된 진도는 서남 해안 일대의 요충지이고 [[육지]]와 [[바다]]를 잇는 거점이었다. 진도 삼별초의 거점이 된 용장성 내에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건설된 건물군(왕궁)이 존재했는데 삼별초를 연구한 윤용혁에 따르면 진도 용장성 건물군의 크기와 설계는 성급하게 내려온 상태에서 급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삼별초의 봉기 이전에 이미 진도에 '천도'할 계획을 세우며 용장성 내의 건물을 지었던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지적했다. 1258년 무렵 최씨 무신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무신정권의 수장이 된 [[김준(고려)|김준]]이 원종과는 각을 세우고 당초 몽골과의 화친 조건이었던 출륙환도도 미루면서 '기회만 되면 몽골의 관리를 죽이고 바닷섬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바닷섬이 진도가 아니라 [[제주도]]일 가능성도 있는데 이미 1260년 1월에 제주부사 나득황에게 제주방호사를 겸하게 하고 2월부터 제주 천도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268년에는 쿠빌라이 칸까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1268년 12월 김준은 원종과 [[임연]]에게 피살되었다). 김준이 강화도에서 다시 옮기려고 한 바닷섬이 진도였으며 용장성의 시설도 그때 정비되었을 것으로 윤용혁은 주장했다.[* 윤용혁, 같은 책, 184~185쪽] 진도를 잃은 고려 조정은 해상으로 운송하던 [[남해]] 지역의 [[조세]]를 거두어 들이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진도를 점거한 삼별초는 8월 19일 여러 주와 군을 침략하고 [[황제]]의 명령이라 사칭하면서 [[전라도]] 안찰사에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거둬들일 것을 독촉하게 하면서 바다 섬으로 옮겨 살게 했다. 9월 2일에는 육지부의 [[나주]]까지 진출했고 나주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남해 지역에서 삼별초의 기세는 그야말로 막강했는데 [[고려사]] 김응덕 열전이나 [[고려사절요]]에는 "적의 세가 성해서 주와 군에서는 소문만 듣고도 진도에 적장(배중손)을 뵈러 가거나 적을 맞아 [[항복]]하기도 했다."고 하고 있을 정도. 9월 4일에 고려의 [[양동무]], [[고여림]][* 고여림은 예전 삼별초 지유였던 인물로 [[탐라]] 성주 일족인데 김준이 임연에게 죽었을 때 삼별초 지유로써 중립을 외치고는 구경만 했고 결국 임연 일파가 승리할 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제주도와 연고가 있는 사람이다 보니 삼별초의 난 당시에 고려 조정의 명으로 제주도로 파견되어 제주도 수비를 전담했으나 막상 삼별초가 제주도에 상륙하자 수탈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은 모두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여기며 환영했고 같은 고씨 일족조차 중립을 선언하고 구경만 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자신이 지휘했던 삼별초에 피살당하고 말았다.]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를 공격했지만 삼별초는 다시 [[장흥군|장흥]]부로 들어 가서 고려 경군 20인을 죽이고 도령 [[윤만장]]을 사로잡고 재물과 곡식을 약탈한다. 고려 조정은 다시 삼별초의 세력 확장을 막고 배후를 노릴 목적으로 고여림과 [[김수]]에게 각각 7백명과 2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가게 했지만 11월 3일 [[이문경]] 등이 이끄는 삼별초 수군이 제주 명월포에 상륙해 송담천에서 고려군을 쳐서 멸하고 제주도를 장악한다. === 나주 공방전 === 남쪽에서는 삼별초의 반격에 북쪽에서는 몽골의 압박까지 겹쳐 고려 조정은 그야말로 [[샌드위치]] 신세였다. 고려 원종은 몽골과의 전쟁 와중인 [[1269년]]에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항복해버린 서북면 지역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쿠빌라이 칸은 오히려 "듣자니 너네는 일본을 공격하는데 물자 조달이 어렵네 뭐네 이런 저런 핑계나 대면서 시간이나 끌고 뒤로는 남송으로 몰래 내통하고 있다며?"라고 닥달해댔다. 삼별초를 막기 위해 보낸 관군 무장들도 답이 없어서, 나주를 지키고 있던 전라도토적사 신사전은 "내가 이미 벼슬이 재상인데[* 신사전의 당시 벼슬은 참지정사(종2품)였다.] 여기서 적한테 이기고 공을 세운다고 얼마나 더 승진하겠나"라며 적을 칠 생각도 없이 삼별초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버리고 개경으로 도망쳐버렸다. 전주부사 이빈도 삼별초의 공격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당연히 면직되었다.] 나주부사 박부는 삼별초 앞에서 눈치만 보며 어쩔 줄을 몰라 곤란해하기만 했다. 상황이 이러니 나주 사람들은 "그냥 삼별초에 항복하자"고 했고, 같이 항복하자는 권유를 들은 전주 사람들은 머뭇거렸다. 나주와 전주가 넘어간다는 것은 전라도 전체가 삼별초에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삼별초가 육지부에까지 전진 거점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고려 조정은 제주가 함락된 바로 다음 달인 윤11월에 만호 고을마를 시켜서 군사 2백 명으로 남쪽에서 삼별초를 막게 하고, 12월에는 몽골에서 온 조서를 원외랑 박천주를 시켜서 삼별초에게 보내며 그들을 달래려 했다. 이때 상장군 정지려가 "섬에서 들어 가서 지키든지 산골짜기로 피하든지 할 것이지 어떻게 고을 수령씩이나 되어서 적을 따르려고 하느냐"고 분개했고, 나주사록을 맡고 있던 상호장 김응덕도 삼별초에 맞서 싸워보자며 수성을 결의해 금성산으로 들어 가서 가시울타리를 치고 적을 막으면서[* 여담으로 [[간양록]]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이 조선의 성을 보고 "저런 허접한 것도 성이래ㅋㅋ"하다가 나주에 와서 [[금성산성]]을 보고는 "조선인들이 작정하고 지켰다면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함락 못했을 곳이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난공불락의 험지에 있었다. 이때의 일본군은 센고쿠 시대의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갖가지 전략전술에 도가 튼 베테랑들이었는데, 그런 이들까지 험지라고 표현할 정도니 금성산의 지세가 그만큼 험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고을에 공문을 띄웠다. 한편 고려 조정은 신사전 대신에 전라도추토사로 역적추토사 김방경을 임명하고, 몽골군 원수 아카이(阿海)와 함께 1천 병사로 진도를 치게 했는데 부임지로 가던 도중에 전주와 나주에서의 한심한 꼴을 전해들은 김방경은 혼자서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전주에 "며칠 안에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 갈 테니 군량 준비하고 대기해라"는 명을 내렸고, 김방경의 첩문이 나주에까지 전해지자 삼별초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고 한다. 김응덕은 이때의 공으로 7품 관직을 받았고 그를 도운 나주 사람 김서, 정원기, 정윤 등도 섭오위를 받았다.[* 이후 김응덕은 진도 공격에서도 공을 세운다.] 김방경은 적이 금성을 치는데도 구하지 않았다며 토적사인 상장군 변윤과 장군 조자일, 공유 등을 탄핵했지만 공유가 환관와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왕은 그들의 관직을 뺏는 것으로 그쳤다고 한다. > 적은 약탈한 함선에 모두 괴수를 그려서 바다에 덮고 물에 비치어 움직이고 바뀌는 것이 나는 것과 같아 기세를 당할 수 없었으며, 싸울 때는 적군이 먼저 북을 쳐서 떠들썩하게 돌진하고는 하였는데, 서로 이겼다가 졌다가 시간만 허비하면서 대치하고 있었다.(중략) 적은 모두 배를 타고 기치를 성대하게 벌여 놓고 징과 북을 쳐서 온 바다가 울렸고 성 위에서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질러 기세를 돋우고 있었다. 아카이는 겁을 내며 배에서 내려 나주로 물러나고자 하였다. > ---- > 고려사 김방경 열전 9월에 새로 전라도토적사가 된 김방경은 [[해남군]]의 삼견원에서 진을 치고 진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는데, 삼별초 수군과 대치한 곳은 해남 삼견원과 진도 벽파정 사이 울돌목 일대였다. 서로 대치하는 와중에 김방경은 반남 사람 홍찬, 홍기에 의해 "김방경이 공유 등과 함께 몰래 적(삼별초)와 서로 내통하고 있다"[* 공유는 삼별초가 나주를 포위했을 때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김방경이 바다에서 삼별초에 포위되었을 때도 구원하지 않았다. 빡쳐서 김방경이 베려고 했을 정도. 이런 인간하고 같이 삼별초에 내통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억울한 것도 모자라 거의 돌아버릴 일이다. 진도 앞바다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 김방경은 공유를 베려고 했지만 아카이가 말려서 그러지 못했고, 대신 고려 조정에서는 공유와 안세정의 관직을 삭탈했다.]고 참소당해 개경으로 올라가서 이들과 함께 다루가치 앞에서 대질심문을 받아야 했다. 무고가 확인되어 상장군으로 진도에 복귀했을 때는 몽골군 원수 아카이 등이 삼별초의 기세에 눌려 배에서 내려 나주로 물러나려고 하고 있었고, 김방경은 "원수가 적 앞에서 물러나면 군사들은 어떡합니까? 당신 황제는 무슨 낯으로 뵐 겁니까?"라며 붙들어놓고 '''자신이 홀로 군사를 이끌고''' 진도를 공격했다가 역습을 당했다.[* 아카이는 이때 구원하지 않았고,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몽골 조정에 보고해 몽골에서는 훈둔(忻都, 忽敦)을 보내 아카이와 교체한다.] 고려 정부군이 모두 퇴각하는 와중에 김방경은 "'''오늘이 결판의 날이로구나'''"라며 적중에 돌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적에게 포위되어 화살도 돌도 다 떨어지고 대부분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진도 해안까지 쫓겨온다. 끝내는 삼별초 병사들이 김방경의 배에 뛰어들어 김방경을 직접 공격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최고 지휘관이 포위된 상태라면 그 전투는 거의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한다.] 김방경은 "에라 적한테 죽느니 차라리 물고기 밥이 되고 말지"라며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지만 옆에서 위사 허송연과 허만지 등이 말렸고, 김방경의 위급함을 본 창병들이 고함을 치며 다시 삼별초군에 맞서 싸웠다. 김방경이 호상에 걸터앉아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이 장군 양동무가 몽충으로 삼별초 선단에 돌격해 적의 포위를 무너뜨리고 김방경을 구원하자 삼별초는 철수했다. 고려사에는 이 전투가 12월 22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몰락과 이후 === 원종 12년(1271년) 1월 6일에 박천주가 쿠빌라이 칸의 조칙을 가지고 진도에 와서 삼별초를 회유하였지만, 삼별초측은 벽파정에서 맞이하는 척하면서 병선 20척을 보내 몰래 고려군을 쳐서 배 한 척을 뺏고 고려 군사 90인을 죽였으며, 22일에 박천주가 돌아갈 때는 국서에 대해서는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쿠빌라이 칸의 조서에 대해서는 "이 조서는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고 회답했고, 박천주와 함께 왔던 반행적사 두원외(杜員外)를 억류했다. 봄 2월에는 다시 장흥부 조양현을 침입해 노략질을 해서 전함을 불태우고 방어 도정령 진정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3월에는 합포현을[* 합포는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공격의 전초기지를 설치한 곳이었다.] 공격해 감무를 사로잡거나 동래군을 공격했다. 진도 삼별초의 공세가 이어지던 1270년에서 1271년은 몽골이 한창 일본원정을 준비하면서 고려에 몽골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 원정군이 먹을 곡식을 고려에서 대라, 고려 땅에 둔전을 설치할 테니[* 몽골에서 와서 진도, 탐라의 삼별초 진압에 참전하게 되는 훈둔(忻都, 忽敦) 역시 둔전경략사의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몽골에서 고려 땅에 일본원정군의 둔전을 경영하겠다고 나오는 것을 반대했지만(고려인들이 경작하고 정부에서 세금 부과할 수 있는 토지가 그만큼 줄어들게 되니까) 몽골 측은 "우리가 너네들한테서 안 뺏고 알아서 자급자족하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그러니까 우리 농사 지을 소하고 곡식 종자나 빨리 내놔!"라며 밀어붙였다. 그나마 소와 곡식 종자를 거두어 가면서 비단으로 값을 매겨주기는 했다마는...] 둔전 경영에 필요한 소와 곡식 종자를 고려에서 내라 등의 요구를 떠넘기고 있었고, 고려에서는 비축해 두었던 것은 육지에 나오면서 삼별초에 다 빼앗겼고 그나마 남은 것도 지금 주둔하는 몽골군에게 대고 있으며 충청, 전라 지역은 삼별초 진압 때문에 소를 징발할 수가 없다고 호소하면서 몽골로 잡혀간 고려 백성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면서 원종 자신이 직접 입조해 이를 호소할 계획을 세웠다. 근본적으로 무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친원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를 전전하며 원나라와 고려에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에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삼별초는 '''1271년 일본에 구원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고려첩장불심조조'라고 해서 일본 [[다자이후]] 측 관리들이 "'''이번에 새로 온 국서가 전에 고려에서 받은 국서와는 내용 취지가 전혀 다르네? 이거 뭐지?'''" 하고 의아해한 부분만을 추려 교토 조정에 보낸 것인데, 대체로 몽골을 칭찬하던 전의 국서와는 달리 몽골을 엄청나게 욕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몽골에 맞서서 함께 싸우자며 군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고, 이런 내용의 국서를 보낼 사람은 시대상황상 삼별초밖에 없다는 것. [[2001년]] 일본 [[NHK]] 대하사극 <[[호조 도키무네]]>에도 이 내용이 등장하는데, 작중 나레이션으로 "이때 고려 본토에서 삼별초가 봉기해서 몽골에 맞서 항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에 구원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막부의 관리들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고 소개하면서, 국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401&tabId=01&levelId=hm_051_0070|#]] 일본과 경계가 가깝던 경상도 지역에서 몽골에 의한 피해가 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월에 경상도 지역에서 밀성군에서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이 밀성군에서 사람들을 모아 장차 진도에 호응하려다 발각되어 실패하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개경에서 관노 숭경, 공덕 등이 무리를 모아 몽골의 다루가치와 고려인 관리를 죽이고 진도로 투항하고자 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2월 7일에도 착량(손돌목)을 지키던 몽골군이 대부도에서 주민들을 약탈하다가 개경에서 숭경, 공덕 등의 모반 소식을 들은 당성 사람 홍택, 홍군비 등 대부도 주민이 몽골인 6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수주부사 안열에게 진압되기도 했다.[* 봉기가 일어난 곳은 경상도와 개경 그리고 경기 지역 서해안 입보처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그 성격상 반몽, 반개경정부 그리고 진도에의 호응을 전제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12세기 이래 지방에 만연했던 민중봉기의 맥락을 계승한 측면이 있다고(윤용혁, 같은 책, 187~188쪽)] 개경에서 일어난 숭경, 공덕의 모반은 2월 5일에 몽골로 간 상장군 정자여에 의해 쿠빌라이 칸에게 보고 되었는데, 쿠빌라이 칸은 모반 소식을 전해 듣고 '''고려 측의 모든 건의를 모두 거절한다'''고 통보해 버렸다. 원종의 입조 계획도 "왕이 있어도 그 모양인데 왕이 없으면 너네 나라 끝장난다. 나한테 올 시간에 너네 나라 반란군이나 진압해라."라는 쿠빌라이 칸의 거절로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삼별초는 몽골과의 교섭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 중서성(中書省) 신하가 말하기를, > “고려의 반역한 신하 배중손이 간청하기를 ‘'''모든 군대가 퇴각한 후에야 내부(內附)하겠다고 하였는데 훈둔(忻都)[* 한자를 그대로 읽어 흔도라고 하기도 한다.]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니, 이제 전라도를 얻어 거주하면서 조정에 직접 예속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그가 말을 꾸며대며 시간을 끌고 있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 ---- > 원사 본기 지원 8년(1271년) 3월 16일 기묘 여름 4월 8일에 삼별초는 다시 금주[* 지금의 김해시.]에 침입한 후에 산성을 불태우고 노략질하고 돌아간 뒤에도 삼별초의 배중손이 다시 몽골의 훈둔에게 교섭을 요청했음이 원사와 고려사에서 보인다. > 고려의 봉주경략사 훈둔이 > "반신 배중손이 사명을 지체시키면서 지세의 험함을 믿고 복속하지 않으니, 간청하건대 쿠룸시, 왕국창과 함께 길을 나누어 가서 치고자 합니다." > 하므로 이를 따랐다. > ---- > 원사 지원 8년(1271년) 4월 9일 임인 > 추토사 김방경이 보고하였다. > "진도의 적이 훈둔에게 '은밀하게 의논할 일이 있으니 관인께서는 잠깐 이 섬에 들러 주십시오.' 하였는데 훈둔은 '내가 황명도 없이 어찌 감히 그 섬에 들어 가겠는가?'라 하였고, 적이 다시 들러달라 청하며 술과 안주를 대접하니 훈둔이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 ---- > 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년) 4월 14일 정미 원사에는 배중손이 훈둔에게 몽골군이 철수하고 나면 내부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훈둔이 들어주지 않자 전라도 지역을 얻어서 몽골 조정에 직접 내속하겠다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 고려사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삼별초 정부와 몽골 주둔군 사이의 교섭 자체는 실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 박천주가 가져온 쿠빌라이의 회유 조서에 대해서 "우리한테 보낸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고 했던 것에 비하면 태도가 바뀐 것으로 다소 의아한 부분. 일본의 무라이 쇼스케는 몽골과의 협상 과정에서 보여주는 배중손의 이 모호한 태도를 진도가 함락되기 전에 보여주는 이 모호한 태도를 두고 배중손은 삼별초 안에서도 투철한 반몽 세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기회주의적인 온건 '동요분자'의 대표 인물이었으며, 이는 삼별초 자체의 내분을 암시하고 배중손은 진도 함락 때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숙청'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윤용혁은 원사에서 쿠빌라이가 배중손의 내부 제안을 "쓸데없이 시간이나 끌려는 헛소리다"라고 일축했던 것이나 연합군의 진도 대공세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훈둔이 "반신 배중손이 사신을 억류하고 지세의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않는다"고 전한 것, 배중손이 이러한 뜻을 전했다고 하는 시점이 이미 진도 대공세를 불과 한 달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고 김방경이 배중손과 훈둔 사이의 접촉을 알아낼 정도로 개경측이 진도의 내부 사정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점 등을 들어서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하면서도 진도 삼별초 내부에 다양한 입장차이가 실재했으며 이것이 내부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윤용혁, 같은 책, 197~198쪽] 4월 19일, 몽골에서 영녕공 왕준의 아들 왕희, 왕옹 두 사람이 4백 군사를 거느리고 진도를 치러 왔는데, 21일에 몽골은 "더위와 장마 오기 전에 몽골 병사들이 고려에 도착하기 힘들것 같은데 너네가 먼저 6천 명쯤 뽑아서 진도를 공격해라. 일찍 끝나면 왕도 백성도 좋은 일 아니냐?"라며 군사 6천 명에 추가로 전함 140척의 징발을 다시금 고려에 요구해 왔다. 5월 1일에 몽골의 홍다구와 훈둔, 고려의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했다. 삼별초는 섬의 북쪽 절벽에 함선을 포열해 놓고 있었는데, 몽골의 경략사 사추가 더위 때문에 바다가 습하고 활이 느슨해진다면서 군을 셋으로 나누어 깃발을 잔뜩 내걸어 병사로 위장하고 자신은 군을 움직여 진도로 가면서 몽골 본국에 화창, 화포 등의 화약 무기를 요청했다. 당시의 여몽연합군의 공격 루트는 고려사 김방경열전에 보면 이러하다. * 고려의 김방경, 몽골의 훈둔이 중군 - 벽파정 공격 * 영녕공의 아들 왕희, 왕옹 및 홍다구가 좌군 - 장항 공격 *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가 우군 - 진도 동면 공격 고려사에는 삼별초가 벽파정의 중군을 공격하고자 나서자 좌군의 홍다구가 진도의 삼별초 본진으로 들어 가는데 성공, 먼저 불을 지르며 협공했다고 하는데, 불을 질렀다는 기록은 화약 무기의 사용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는 무너져 공격 방향을 우군으로 돌렸고, 우군이 놀라 중군 쪽으로 합류하려는 것을 다시 배 두 척을 빼앗고 그들을 죽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분격에 삼별초는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고, 무너지는 적을 추격해 남녀 1만 명과 전함 수십 척을 노획하고 진도에서 쌀 4천 섬과 재화, 보물, 병장기를 얻어 수도로 보내고 양민은 생업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때 진도에 있다가 포로로 잡힌 자들 가운데는 강화도에서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진도에서 살던 주민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그런 것 없이 모조리 포로로 취급해 잡아가는 바람에 진도는 거의 빈 섬이 되어, 고려 조정에서는 이후 몇 번에 걸쳐 이들의 송환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배중손은 이후 기록에 나오지 않는데, 이때 죽은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승화후 부자도 홍다구에게 죽었다. 용장성이 함락될 때 삼별초는 2대로 나누어 각기 의신포(금갑포?)와 남도포로 향해 퇴각하였는데, 배중손은 남도포 쪽으로 향하다 남도석성에서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다만 남도성이나 금갑진성은 조선 초에 왜구를 막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윤용혁, 같은 책, 195~196쪽] 진도가 무너진 뒤 의신포(금갑포라고도) 방면으로 달아난 김통정이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탐라)로 들어갔다. 이때 삼별초 중에서 일부는 남해현을 점거하고 연해 지방을 공격해 노략질하다가, 김방경 등의 공격으로 인해 본대가 제주도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배 80여 척을 이끌고 따라갔다. == 여담 == * [[진도군]] 임회면에 배중손의 동상과 사당이 존재한다. 현지에서는 남도석성에서 굴포 해안 쪽으로 이동하던 배중손이 전사한 부지로 당시에는 바다 뻘밭이었으며, 일제 이전부터 마을 당이 있었다고 전하는 곳이라고 한다. 진도 현지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농악을 치고 배중손과 삼별초군 그리고 고산 윤선도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왔고, [[1959년]] 「사라호」태풍으로 당(堂)이 허물어졌던 것을 굴포 출신 동양화가 백포 곽남배 씨가 주민 성금과 사비를 들여 현 위치에 5평 규모의 사당과 신당비를 세우고 굴포 주민들이 제를 모셔왔다. 1980년대 말 당시 남선리장 강진간이 주축이 되어 4개 마을 청년들이 뜻을 모아 현 위치에 고산 윤선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의 성금으로 비를 세우고(91.4.6)그 뜻을 기렸다. 1996년 배중손사당 재건립에 필요한 예산을 전라남도에 건의하여 1998년 12월부터 1999년 6월까지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9년 8월에 배씨 대종회에서 종친 성금을 모금하여 배중손장군 동상을 건립하고 진도군에 기증하였다.[[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4399f4a7-3f43-4573-aa38-92c911cbed84&big_category=A02&mid_category=A0201&big_area=38|#]] * 배씨인 것은 맞는데 본관이 확실하지 않아 배중손의 본관은 배씨들 사이에서의 영원한 떡밥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근대에 역적으로써 죽은 사람이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버젓이 기록을 남겨 두는 것부터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싶어서 작정한 행위다. 윤용혁은 [[진도군]] 내지는 [[상주시]] 지역과 연고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삼별초가 외세에 맞서싸운 영웅이라는 재평가를 받자 서로 배중손이 자신의 조상이라 키배를 벌이고 있다. == 대중매체에서 == * [[신암행어사]]에 배중손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중손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 과거 야후코리아에서 연재된 쌈닭이라는 만화에서도 등장하며 초반 삼별초 휘하의 신의군을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후 삼별초를 이끌고 몽골과 대적한다. 현재는 야후 서비스가 종료되어 탑툰으로 옮겨졌다.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 사용자 시나리오 (11??년)에 원종과 함께 고려측 무장으로 등장한다. * [[형민우]]가 [[다음 웹툰]]에 연재한 웹툰 <삼별초> 5화에서 등장하는데, 몽골의 사신 차라대([[자랄타이]]) 앞에서 삼별초 군사들을 제외한 국왕과 군신, 군인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와중에 술에 취해 술병을 들고 궁에 들어 와서는 우리 왕이 하사한 칼을 지금 돌려주러 왔다며 바닥에 내리쳐서 부러뜨리고, 최씨의 개라느니 무신정권의 앞잡이라느니 욕하는 신하들 앞에서 "전쟁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거 야박하게들 구시네..."하며 너스레를 떨고는, 몽골군을 향해서는 앞으로 서로 볼일 많을 텐데 벌써부터 칼 빼들고 힘 빼지 말자며 삼별초를 데리고 궁을 나가버린다. 이후 나레이션으로 2년에 걸쳐 삼별초 항쟁이 전개되었음이 설명되고, 진도가 함락된 뒤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 의자에 걸터앉아 양손에 술병과 칼을 쥐고 눈을 부릅뜬 채로 죽은 모습이 그려진다. 한 화에서만 등장했을 뿐이지만 존재감은 확실히 드러냈다. [[왼손잡이]]인지 칼을 왼손에 들고 나온다. == 같이보기 == * [[삼별초]]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삼별초, version=61, title2=삼별초의 난, version2=32, title3=원종(고려), version3=70, title4=배(성씨), version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