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본명이 배상명인 음악인, rd1=세이미)] [[분류:강서군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분류:1986년 사망]][[분류:실향민]][[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상명대학교 총장]][[분류:상명대학교]][[분류:대학교 설립자]][[분류:국민훈장 모란장]][[분류:동덕여자고등학교 출신]] [[파일:external/www.antichrist.or.kr/bsm.gif]] [[파일:external/museum.smu.ac.kr/IMG_36.jpg]] [목차] == 소개 ==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의 교육자. 여성교육과 [[녹화사업|국토녹화]]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 1968년 [[경희대학교]] 명예법학박사, 1971년 산림사업발전 유공표창, 198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유공자이기도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교육/학술부문에 이름을 올린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호는 계당(桂堂)과 민정(敏廷). 창씨는 蒲田(카마타), 芳村(요시무라). 어렸을 때는 '배순덕'이라는 이름을 쓰고, 한동안 '배순명'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던 모양이다. == 교육 활동 == [[파일:external/www.smuc.ac.kr/653135_1.jpg]] 열일곱 살 때인 1923년 경성(서울) [[동덕여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4월, 경성 삼선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중일전쟁 2개월 전인 1937년 5월 도쿄고등기예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이때부터 교육 행정가의 면모를 띠게 된다. 귀국 후 1937년 11월에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 자리였다가 이 일대가 재개발이 되면서 현재는 트윈 트리 타워가 들어섰다.]에서 상명여자고등기예학교를 건립한다.[* 오늘날 [[상명학원]]와 [[민정학원]]의 뿌리.] 1940년에는 이 학교를 상명실천여학교로 변경하고 교장을 맡았다. 1945년에 재단법인 상명학원을 설립, 이후 1965년에 서울 세검정에 [[상명대학교|상명여자사범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한다. 이외에도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이사, 대한민국문학예술상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상명학원]] 이사장, [[영훈고등학교|영훈학원]] 이사장, [[상명고등학교|민정학원]] 이사장, [[동덕학원]] 이사등 다양한 직을 맡으며 교육분야에서 활동했다. == 친일 행적 == 여기까지만 보면 훌륭한 교육자지만... 이화여대의 [[김활란]], 성신여대의 [[이숙종]], 서울여대의 [[고황경]], 경성대의 김길창 못지 않은 빼박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이다. 네임밸류는 다른 친일교육인들에게 밀리지만, 그저 설립자 혹은 총장 수준에 지나지 않은 다른 친일교육인들과 달리 자신의 이름을 대학에 박아놓았다는 점 덕분에 이름 자체는 가장 유명할 수도 있다. 배상명은 친일단체인 '전위여성격려대'가 만들어졌을 때 가담해서 [[북한]]의 여러 지역에 파견되어 강연을 일삼았으며, 태평양전쟁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어 황국신민과 징병 독려를 주창했다. 조선인들을 [[일본군]]에 징집한다는 명령이 떨어지자,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며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적으면서 일본정신에 입각한 군국의 여성이 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언행을 일삼기도 했다. 다음은 1942년 5월 매일신보에 기고한 ‘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라는 글 중 한 대목. >1944년부터 징병령이 조선에도 실시되게 된 것은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아직까지 지원병에 부치던 반도인에게 이제는 떳떳한 제국의군인으로서 국방의 중책을 지게 된 것은 크나큰 광영이며, 더구나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우선 교육자인 입장에서 반도의 여성을 어떻게 교육하며 더구나 군인의 아내요 어머니인 중책을 담당하여 나갈 군국 여성을 연성하는 데 종래보다 더 한층 결의를 새로이 하며 교양과 지식을 길러나갈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흔히 말하는 총후부인(銃後婦人)론을 연상시키는데, 총후부인론이란 아들과 남편을 전쟁에 보낸 여성은 자랑스럽게 국가를 지키기 위해 떠난 남자들을 대신해 씩씩하게 가계를 돌보고 후방을 책임지는 여성상을 말한다. == 기타 == [[파일:external/museum.smu.ac.kr/%EC%98%81%EB%AC%B8%EA%B0%95%EC%97%B0%EC%B4%88%EA%B3%A0%EC%99%80%20%EC%9E%AC%EB%AF%B8%ED%99%9C%EB%8F%99%EC%82%AC%EC%A7%84.jpg]] 자타공인 [[한복]] 매니아로서, 외국에 나갈 때에도 꼭 한복을 입었다고 한다.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상명대학교]]에는 그녀의 호를 딴 건물(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의 계당홀, 천안캠퍼스의 계당관), 장학금(계당장학금)이 있다. 또한, 상명중학교와 상명고등학교의 재단인 민정학원은 그녀의 호 '민정'에서 따온 것이다. 배상명의 묘지가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산]]에 있다. 배상명은 천마산 일대에서 육림사업을 펼치기도 했고, 상명여자사범대학 학생들의 생활관(수련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상명학원이 이 일대의 땅을 소유하고 있어, 꾸준히 상명대 남양주 캠퍼스 설립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참고로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에는 배상명의 호를 딴 계당홀과 천안캠퍼스에는 계당관이 있다. 계당홀은 평소에는 봉인(...)되어 있다가 외부에 방송전파를 탈 일이 있거나, 외부 손님~~돈을 꼬박꼬박 갖다바칠 신입생~~들이 몰려올 일이 생기면 봉인을 해제한다. >선생은 소녀 시절에 겪은 [[3.1 운동|3•1 운동]]을 통하여 >[[개소리|민족의 비운을 통감하였다]] > >신분의 차별이 없는 국민 교육만이 민족의 자주와 >번영을 이루는 지름길이라 깨달은 선생은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교육 풍토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셨다 > >1937년 상명고등기예학원은 그렇게 설립되었고 >그것이 진리 정의 사랑을 이념으로 하는 >[[상명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 >역사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과감한 헌신에 의하여 발전한다면 >계당선생은 분명 근대 교육사를 이끈 >선구자 중의 한 분으로 자리하리라 >---- >''계당홀 내 배상명 동상 아래 글'' 서울과 천안 양 캠퍼스 모두에 배상명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과거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자주 끌어내려지는 등 수모를 겪었고, 현재에도 재학생들에 의해 각종 오물이 투척되고 있는 상황. 2011년 1월 [[전국노래자랑]] [[종로구]] 편을 상명대학교 계당홀에서 녹화했다(...)[[http://www.clubcity.kr/news/articleView.html?idxno=70931|#]] 또 배상명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자, [[상명대]] 측에서 배상명을 제외하려고 직접 항의했다는 것이다. ~~[[이뭐병|왜 그렇겠어? 이사장이 배상명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몇몇 재학생들은 스스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세운 학교에 다닌다는 식으로 자조적으로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다.[* 이건 상명고등학교 재학생들 또한 비슷한 반응이다.] '''물론 옹호하는 재학생들은 사실상 아무도 없다.''' 또한 서울에 있는 [[상명고등학교]][* 고등학교와 거의 모든 시설을 같이 쓰는 [[상명중학교]]도 포함]에도 배상명 동상이 있다. 2013년 후반에 과거 배상명이 집무실로 사용하던 서울캠퍼스 건물에 계당 배상명 기념관을 새롭게 오픈하였는데, 배상명이 사용하던 집무실의 내부 인테리어를 리모델링하였고 배상명의 일대기와 생전 육성, 각종 훈장 및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상기한 친일부역에 관한 내용은 전혀 전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어린 시절 [[3.1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하거나,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했다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