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방화중}}}'''[br]'''邦化重'''}}}}}} || ||<|2> '''출생''' ||[[1877년]] || ||[[황해도]] [[안악군]] || || '''사망''' ||[[1940년]] [[12월 11일]]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77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고, 그해 11월 11일 [[안창호]] 등이 조직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 상항(桑港)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자 이름이다.]에 가입해 1905년 1월부터 1905년 3월까지 회계 겸 학무로 일했다. 1905년 4월 5일 상항친목회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063247&categoryId=40549|공립협회]](共立協會)로 확대 개편되자 공립협회 총회 본부인 공립관(共立館)의 사무를 맡게 되었고, 상항지방회 회계 겸 학무를 겸임해 1907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05년 11월 22일에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가 창간되자, 편집인으로 취임해 1907년 3월까지 신문사 사무를 주관했고, 모필(毛筆:짐승의 털로 맨 붓)로 전 신문지면을 [[http://db.history.go.kr/id/oh_020_0010_0010_0060|제작했다]]. 1907년 2월에는 공립협회 회원으로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60550&docId=5569470&categoryId=63762|태극학보]](太極學報)》에 의연금 2원을 [[http://db.history.go.kr/id/ma_007_0070_0220|기부했다]]. 1907년 10월에는 [[로스앤젤레스]]로 활동 지역을 옮겨 나성지방회(羅城地方會)[* 나성(羅城)은 [[로스앤젤레스]]의 한자이름이다.]에 가입했고, 1908년 2월부터 1909년 1월까지 나성지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08년 8월에는 로스앤젤레스 부근 클레어몬트시(Claremont)에서 학생양성소를 개설하자 이에 참여했고, 1908년 9월부터 학생양성소 총무에 선임되어 양성소 사무를 총괄했다.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합성협회(合成協會)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등 미주 지역의 한인 단체들이 통합해 국민회(國民會)를 결성하자, 여기에 가입했다. 이 즈음 [[멕시코]] [[유카탄]]에 이민 왔던 [[일본인]]들이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같은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지배 하에 두려고 자주 찾아와 분란을 일으키곤 했는데, 이 시기 멕시코의 조선인들이 국민회에 자신들의 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방화중은 1909년 4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황사용(黃思溶)과 함께 견묵위원(遣墨委員)[* [[멕시코]]를 한자로 묵국(墨國), 묵서가(墨西哥) 등으로 음역하곤 한다.]에 선임된 뒤 멕시코에 파견되었고,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메리다(멕시코)|메리다]]지방회 창립에 큰 기여를 했다. 그 뒤 미국으로 돌아와 1909년 7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외교원에 선출되었다. 1910년 1월에는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에 선출되었고, 4월에는 북미지방총회 학무에 선임되었다. 1910년 5월 10일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개칭된 뒤 1911년 4월 북미지방총회 학무에 재선임되었고, 8월에는 중앙총회 학무원 겸 서기 대리에 선임되었다. 1916년 2월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구제원을 거쳐 1916년 4월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1918년 11월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파견되어 [[이승만]] 등 10여 명의 인사들과 함께 소약국동맹회 및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조선인 대표자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1928년 3월에는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 [[http://db.history.go.kr/id/had_118_0380|발기인으로서]] 창간에 참여했고, 1940년 12월 11일 별세했다. 201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안악군 출신 인물]][[분류:1877년 출생]][[분류:194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희귀성씨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