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몰년 미상]][[분류:발해의 왕족]][[분류:발해의 유민]] [include(틀:발해부흥운동 군주)] ||<-3><:>
'''{{{#FFD700 발해의 왕족}}}'''|| || '''{{{#white 호칭}}}''' || '''발해왕제(渤海王弟)'''[br] 발해왕(渤海王)?[* 송사의 기록. 대인선이 거란으로 끌려간 상황이라 칭왕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渤海王弟'의 오기로 보인다.] || || '''{{{#white 직위}}}''' || '''미상''' || || '''{{{#white 성씨}}}''' || '''대(大)''' || || '''{{{#white 이름}}}''' || '''미상''' || || '''{{{#white 생몰연도}}}''' || '''미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발해]] 말기의 왕족, 부흥운동가. [[구오대사]], [[송사]], 책부원구, 오대회요에서 언급되는 인물로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발해왕제는 발해왕의 동생이라는 뜻인데, 구오대사에서 '지금 발해왕의 동생(今渤海王弟)'으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마지막 국왕인 [[대인선]]의 아우로 추정된다. 대씨족보에는 해당 인물이 대권으로 나와있지만 후대의 기록이기에 실제 이름이었을 가능성은 적다. == 생애 == [[926년]] 음력 7월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인 [[부여성]]을 포위해 공격하였다고 한다. 공격 이후의 기록은 없으나, 송사 외국열전에서 '''이길 수 없었다(不能克)'''고 적은 걸 보면 발해왕제의 부여성 공격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오대회요에 의하면 부여성 전투 이후 무리를 보존하여 퇴각하였다고 하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 기타 == * 2005년 영화 [[무영검]]에 등장하는 발해 왕족 대정현은 이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 형 [[대인선]]의 조카인 [[대원겸]], [[대원양]]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발해왕제의 아들인지는 불명. * 조선 후기 학자인 [[정약용]]은 고려로 망명한 세자 [[대광현]]이 발해 멸망 후 임의로 왕위에 오른 발해왕제(대인선의 아우)의 아들로 보기도 했다. == 의문점 == 구오대사, 송사, 책부원귀에서는 926년 음력 11월 발해왕제의 부여성 공격기사를 실고 있으나 직접 맞붙은 거란 측의 기록인 [[요사]]나 [[거란국지]]에서는 926년 음력 7월 ~ 음력 11월 사이 발해왕제의 부여성 공격이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같은해 8월 발해 15부 중 부여부와 인접한 장령부(長嶺府)가 [[거란]]에 저항하자 강묵기(康黙記), 한연휘(韓延徽) 등의 거란군이 장령부를 공격[* 요사 강묵기, 한연휘 열전 참조.]해 회발성(回跋城)을 함락한 기록[* 요사 소아고지 열전 참조.]이 남아있다. 장령부는 부여부와 인접한 지역이므로 왕제 세력은 장령부 지역에서 저항했을 가능성이 있고, 후당 측에 보고된 내용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 관련 기록 == >十一月戊午, … 靑州奏, 得登州狀申, 契丹先攻逼渤海國, 自阿保機身死, 雖已抽退, 尙留兵馬在渤海扶餘城, 今渤海王弟領兵馬攻圍扶餘城內契丹次. 【案, 契丹次, 蓋言契丹方卽次也. 薛史前後如攻城次·鎭州次, 多單用次字, 疑卽當時案牘之文, 今仍其舊, 附識于此. 舊五代史考異】 >11월 무오일, (...) 청주(靑州)에서 아뢰기를, “등주(登州)의 보고에 따르면 거란이 먼저 발해국을 공격하였는데 아보기(阿保機)가 죽자 이미 퇴각하였으면서도 오히려 군대를 발해 부여성(扶餘城)에 머물게 하여, 지금 발해왕의 아우[今渤海王弟]가 군대를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 안의 거란군을 포위하여 공격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거란차(契丹次)’는 거란이 바야흐로 머물었음을 말한다. 『구오대사[薛史]』의 앞뒤에 ‘공성차(攻城次)’, ‘진주차(鎭州次)’와 같이 단지 ‘차(次)’자만을 쓴 것이 많아 당시 문서의 문구가 아닌가 한다. 지금 옛 것을 그대로 하여 여기에 붙여 알린다. 『구오대사고이(舊五代史考異)』】 >-『구오대사(舊五代史)』권37卷37 당서(唐書)13 명종(明宗)3 天成 元年 11月 戊午- >阿保機死, 渤海王復攻扶餘,不能克. >아보기가 죽자, 발해왕(渤海王)이 부여(扶餘)를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송사(宋史)』외국열전 발해(渤海)- >明宗天成元年(926) 十一月, 靑州霍彦威奏:「得登州狀申, 契丹先發諸部, 攻逼渤海國. 自阿保機身死, 雖已抽退, 尙留兵馬, 在渤海扶餘城, 今渤海王弟部領兵士, 攻圍扶餘城契丹.」. >[[명종(후당)]] 천성(天成) 원년 11월, 청주(靑州)의 [[곽언위]](霍彦威)가 아뢰길, "등주(登州)의 보고에 따르면 거란은 제부(諸部)를 먼저 출동시켜 발해를 공격하였습니다. 아보기(阿保機)가 죽었으나 이미 퇴각하였으나 상당 수의 병사와 말들이, 발해 부여성에 있고, 지금 발해왕의 동생이 부의 병사를 이끌고 부여성에서 거란(契丹)을 포위해 공격하였습니다." >-『책부원구(册府元龜)』권195 외신부- >(중략) 未幾, 阿保機死, 渤海王命其弟率兵攻扶餘城, 不能克, 保衆而退. >(중략) 얼마되지 않아 아보기(阿保機)가 죽고, 발해왕(渤海王)은 그 동생(弟)에게 명하여 병사를 인솔시키고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무리를 보존하여 퇴각하였다. >-『오대회요(五代會要)』 권30(卷三十) 발해(渤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