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황제)] || '''{{{#FCE774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로마 제국의 전제정)] ----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4세기)]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CE774,#FCE774 로마 제국 제44대 황제}}}[br]{{{#FCE774,#FCE774 {{{+1 발레리우스 세베루스}}}[br]VALERIVS SEVERVS}}}'''}}}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Severus_II_Aureus_Joanneum.jpg|width=100%]]}}} || || {{{#FCE774,#FCE774 '''이름'''}}}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br](Flavius Valerius Severus) || ||<|2> {{{#FCE774,#FCE774 '''출생'''}}} ||미상 || ||[[로마 제국]] [[일리리아]] || ||<|2> {{{#FCE774,#FCE774 '''사망'''}}} ||307년 9월 || ||[[로마 제국]] 트레스 타베르나에 || ||<|4> {{{#FCE774,#FCE774 '''재위 기간'''}}} ||{{{#000 서방 부제}}} || ||[[305년]] [[5월 1일]] ~ [[306년]] [[7월 25일]] '''(1년 2개월)''' || ||{{{#000 서방 정제}}} || ||[[306년]] [[7월 25일]][* 정제,,,Augustus,,,시기,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1세가 사망한 7월 25일부터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클로루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제위를 요구하면서 늦어졌다.] ~ [[307년]] [[4월]] '''(9개월)''' || || {{{#FCE774,#FCE774 '''전임자'''}}} ||[[콘스탄티우스 1세]] || || {{{#FCE774,#FCE774 '''후임자'''}}} ||[[리키니우스]] || || {{{#FCE774,#FCE774 '''배우자'''}}} ||플라비우스 세베리아누스 || || {{{#FCE774,#FCE774 '''종교'''}}} ||[[로마 신화|로마 다신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부하. 세베루스 2세라고도 한다. 305년 갈레리우스로부터 서방 부제로 발탁되어 이탈리아 및 [[북아프리카]]를 통치하였다. == 상세 == === 서로마 제국 부제 === 서기 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의 일리리아 북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변방 출신인데다, 출신 가문 역시 미천했다고 한다. 따라서 출세를 위해 로마군에 입대했다고 하며,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군대 내 요직을 두루 거쳐 고위장교까지 승진했다. 군생활 중 [[갈레리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큰 도움이 되었고, 오랜 기간동안 갈레리우스의 부하로 남았다. 이후 동방 정제였던 갈레리우스는 305년 그를 새로운 서방 부제에 임명했다. === 서로마 제국 정제 === 306년 공동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자, 순번에도 없던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휘하 군대에 의해 추대되었지만, 갈레리우스가 부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 정제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부제로 각각 인정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 폐위 === 306년 10월, 로마에서 전임황제인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여기에 격분하여[*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정제로만 286~305로 20년 가까이 있었고, 자기는 그 적자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비해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는데(그것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용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결과인데) 그의 서자[* 정략결혼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어머니인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를 버렸으니까.]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서,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를 받아냈으니까. 빡치려면 빡칠 만 하다. 4두정치에 내재된 문제점이 이것이다.] [[SPQR|원로원과 일반 시민]][*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의 정책적 불만[*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자([[사두정의 내전]]),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로 진격했으나 패배하고 [[라벤나]]로 퇴각했다.(307년 2월) 이후 라벤나의 요새를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막시미아누스의 계략에 속아, 원래는 제대로 대우받기로 약속을 받고 항복했지만 포로가 되어 307년 9월 16일 처형당했다. [[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로마 황제]][[분류:사두정치]][[분류:4세기 집정관]][[분류:퇴위한 군주]][[분류:307년 사망]][[분류:로마 제국의 고대 로마 다신교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