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북송의 대신[br]정무혜왕(鄭武惠王)[br]{{{+1 潘美 | 반미}}}'''}}} || || '''{{{#fff 작호}}}''' ||정왕(鄭王) || || '''{{{#fff 시호}}}''' ||무혜(武惠) || || '''{{{#fff 성씨}}}''' ||반(潘) || || '''{{{#fff 이름}}}''' ||미(美) || || '''{{{#fff 자}}}''' ||중순(仲詢) || || '''{{{#fff 부친}}}''' ||반린(潘璘) || || '''{{{#fff 생몰}}}''' ||925년 ~ 991년 || || '''{{{#fff 출생}}}''' ||대명부(大名府) 대명현(大名縣) || || '''{{{#fff 주군}}}''' ||[[태조(후주)|주태조]][br][[세종(후주)|주세종]][br][[공제(후주)|주공제]][br][[태조(송)|송태조]][br][[태종(송)|송태종]] || || '''[[국적|{{{#fff 국적}}}]]''' ||후주(後周) → 북송(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의 명장으로 개국공신. 자는 중순(仲詢). == 생애 == 대명부(大名府) 출신으로 부친인 반린은 군교(軍校)로 상산(常山)에 진수하였다. 태조 [[조광윤]]과 친분이 깊었으며 971년에 [[남한(오대십국시대)|남한]], 975년에 [[남당]], 979년에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멸망시키며 송나라의 중원 통일을 주도하였다. 979년 말에는 [[요나라]] 군대의 침공을 대파하였고 983년에 한국공으로 봉해졌다. 986년, 태종의 2차 북벌 시에는 서로군을 이끌어 [[연운 16주]] 중에서 환주, 삭주, 운주, 응주 등을 회복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하지만 동로군의 조빈이 대패하여 후퇴하던 중에 후방을 엄호하던 [[양업]]을 돕지 않아 그가 진가곡에서 전사하자 태종은 반미를 검교태보로 격하시켰다. 991년에 동평장사로 제수되었으나 몇달 뒤에 사망하였다. 사후 991년에 태조의 능에 배향되었고 정왕에 추봉되었다. 그 후손들도 대대로 송조의 벼슬을 하였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il092003&logNo=220190825484&isFromSearchAddView=true|송사 반미 열전 국문 번역본]] 그런데, 이 인물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양업을 돕지 않아 그를 죽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양업이 패한 원인은 이 인물에게 있지 않으나, 아무래도 양업과 얽히는 인물들 중 가장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그는 이후 수도 없이 많이 나온 [[양가장연의|양가장]] 관련 무협 영상물에서 악역으로 찍혀버려, 송나라의 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평이 아주 좋지 않게 되었으니 매우 억울한 일이다. 의외로 후주 마지막 황제인 [[시종훈]]과도 얽힌다. 시종훈의 동생 시희양(柴熙讓)을 입양하여 반유길(潘惟吉)로 개명시켜 [[시영]]의 핏줄을 보전케 했다. 시종훈은 자식 없이 죽어 시영의 자손들은 반유길의 후손만 남게 되므로 모두 반씨가 되었다. [[진종(송)|진종]]의 황후인 [[장회황후]]가 반미의 딸이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반미, version=1064)] [[분류:송나라/인물]][[분류:한단시 출신 인물]][[분류:925년 출생]][[분류:99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