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致祐 [[1909년]] [[8월 22일]] ~ [[1949년]] [[11월 20일]]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 때 철학자이자 교수이다. == 생애 == === 일제강점기 시절 === 박치우는 1909년 8월 22일 [[함경북도]] [[김책시|성진군]](現 [[김책시]])에서 개신교 목사 박창영(朴昌英)[* 1880년 ~ 1940년. [[함경도]] [[단천시|단천도호부]](現 [[함경남도]] [[단천시]]) 출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1월 발간된 잡지 『문장』의 <조선문예가 총람>에는 출생지가 함경북도 성진군으로 기재되어 있는 반면, 1936년 1월 발간된 잡지 『조광』의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에 소개된 저자 약력에는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본적은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면 미길정 7번지.[[https://www.facebook.com/isepr/posts/2992283330841875/|#]] 부친 박창영은 그의 출생 직후인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13년 3월 졸업한 후 함경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함경도 벽촌을 비롯해 시베리아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기에 박치우는 넉넉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다. 1928년 3월 함경북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제5회(문과B)로 입학하였다. 1930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철학 및 철학사를 전공했으며, 1933년 3월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시기 졸업한 동기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낸 [[박종홍]]·[[고형곤]] 등이 있었다.] 졸업 직후 그는 지도교수였던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의 연구실 조수[[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2&totalCount=2&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6%9C%B4%E8%87%B4%E7%A5%90&brokerPagingInfo=&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6%9C%B4%E8%87%B4%E7%A5%90&searchKeywordConjunction=AND|#]]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였다. 1934년 9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에 채용되어 경성제국대학 연구실 조수를 사직하고 4년여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그 사이, 1935년 1월 [[동아일보]]에 <나의 인생관: 인간철학 서상>을 기고하면서 민간 학술 영역에 발을 들였고, 같은 해 6월 「불안의 정신과 인테리의 장래」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1936년 1월 잡지 『조광』에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 우리 비평사의 중요 논점이었던 고전론·교양론·신체제론 등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신남철]](申南澈)·서인식(徐寅植)·인정식(印貞植) 등과 함께 전형기 비평계의 신경향을 대표하는 평론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1938년 3월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되자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그해 4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및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고, 이때 [[이원조]]·[[김기림]]을 상관으로 만나기도 했다. 1940년 6월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 고대철학 전공으로 입학하였는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면서 퇴직금 천원을 받고 퇴사하였다. 1942년 6월경 그는 [[방응모]]가 조선일보 폐간에 대비해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독립시켜 개편한 '조광사(朝光社)'에 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http://db.history.go.kr/id/hs_001_1942_09_10_0800|#]], 1943년 2월 절필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 해방정국 === 그후 1945년 8월 [[베이징]]에 체류하던 중 [[단파방송]]으로 일제가 곧 항복할 것을 듣고 [[장춘]]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그는 재류동포들을 모아 '신경(新京)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대표위원에 취임하고 동시에 [[중국국민당]] 지하조직체와 연락하여 "조선민족과 중국민족은 조금도 충돌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이번 종전으로서 한층 더 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의 삐라와 포스터를 국민당의 이름으로 찍어 트럭에 실어 가지고 중국인 거주지에 뿌리고 중국인을 상대로 가두연설도 하는 등 쓸데 없는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이튿날인 16일 그는 조선학술원 산하 실무진에 선임되었고 18일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문학건설본부 평론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후 10월 [[북한]]을 거쳐 그 달 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1월 '임시정부 영수 환국 전국환영회'의 보도부 위원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자 평론부 위원에 취임하였다. 또 같은 달 조선과 소련 양국의 친선과 문화 교류 및 발전을 위하여 자연과학·인문과학·예술계·법조계·언론계 등 각계를 망라한 대표 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석하여 '조소(朝蘇)문화협회'를 창립하였을 때 이에 참여하여 경과 보고를 맡기도 했다. 1946년 1월 좌익 29개 단체가 '[[민주주의민족전선]]' 발기준비위원회를 개최하자 박치우는 결성준비위원으로 1차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같은 해 2월 결성준비위원회 사무국 선전부원에 취임하였다. 이때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가 개최되자 참석하여 특별보고로서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는 이원조의 제안으로 긴급동의에 부쳐져 참가자들에 의해 결의안으로서 채택되기도 했다. 그는 이 발표를 통해 민족 감정에만 호소하는 국수주의 및 파시즘이 비합리성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합리성의 원리, 합리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민주주의 전선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이때 조선문학동맹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칭되었는데, 여기에 그도 가입하였다. 2월에는 [[YMCA]] 회관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당시 [[여운형]]·[[허헌]]·[[박헌영]]·[[김원봉]]이 공동의장으로 취임했었다.]에 조선문화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출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달 민주주의민족전선 교육문화대책 연구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3월 25일 좌익 계열 신문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3295|현대일보]](現代日報) 창간에 참여하여 발행인 및 주필을 맡았다.[* 소설가 [[이태준(소설가)|이태준]](李泰俊)이 주간을, 시인 [[김기림]](金起林)이 편집장을 맡다가 나중에 이원조가 편집장을 맡고 김기림은 고문을 맡게 되었다. 외보책임자에는 김영건(金永健)을 기용했다.] 4월에는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할 때 동행하였으며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주최의 '민족문화건설 전국회의' 첫째 날에 문화 일반에 관한 보고의 일환으로 <민족문화와 세계관>을 발표했으며, 6월에는 조선문학신인회 결성에 참여했고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자 재차 동행했다. 그러다가 그해 7월 13일 평안청년회 소속 20여 명의 청년들이 같은 달 11일에 기고된 <지방열을 타파하자!>라는 글이 우익을 자극한다며 현대일보사를 방문하여 박치우에게 4시간 가량 보복을 가했다. 이들은 곧 구속 수사를 받았으나 테러 사건이 아닌 단순 폭력 행위로 처리되어 곧 석방되었으며, 당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박치우가 고소를 한다면 폭력범으로 입건하겠다고만 표명했다. 결국 현대일보사는 16일 평안청년회 [[문봉제]] 대표에 사과문을 보내고 이튿날 문제의 기사를 취소했다. 한편, 박치우는 7월 20일부터 1주일 간 조선문학신인회에서 주최한 신인문학 강좌 강사로 활동하였고 8월 1일에는 조선민주청년동맹에서 개최한 청년 [[반전]] 대회에 참여하여 '반전과 문화'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같은 달 29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국농민회총연맹]]·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부녀총동맹 등의 민주적 대중단체들이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동문제를 객관적 입장에서 검토하기 위해 간담회를 개최하고 토의 결과 3당합동촉진위원회 구성하였는데, 이때 박치우는 사무장에 임명되었다. === 월북 === 그해 9월 미군 헌병들에 의해 현대일보사가 수사에 착수되었고 소속 기자들 다수가 연행되었으며, 이튿날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이 내린 미태평양 점령군사령부 포고령 제2호에 의해 현대일보가 [[박헌영]]·[[리강국]] 등과 관계되어 [[조선공산당]]의 성명서[* 현대일보 제165호 9월 6일자 2면에 <하 중장 성명에 대하여 (상)―조공 중앙위원회 서기국 성명>(9월 3일 조선공산당의 성명서)]를 싣었다는 이유로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이때 박치우는 책임자로서 법정에 소환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잠적하였다. 결국 [[미군정청]]은 박치우의 부재를 이유로 현대일보의 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1947년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의 서상천에게 발행을 맡겼다. 1947년 초 박헌영은 서울 및 남한과의 연락을 위한 전초기지로 [[황해도]] [[해주시|해주군]]에 지도부를 설치했는데, 박치우는 [[남조선노동당]] 간부 박승원(朴勝源)과 문학가 이원조, 이태준, [[임화]], 김태준(金台俊) 등과 함께 실무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부대시설로서 인쇄소와 출판사, 상사 등을 북측으로부터 제공받았는데, [[북조선로동당]] 황해도당이 사용하던 제일인쇄소를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각종 선전물을 만들어 서울에 살포하였다. 그해 10월 박치우는 노동당 간부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의 정치부·교무부 주임을 맡았고 부원장을 겸임하였다. === 최후 === 1949년 9월 6일 박치우는 9월 총봉기를 위해 [[이호제]] 전 남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이 지휘하는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제1병단 5개 중대 360명과 함께 [[조선인민유격대]] 제1병단 정치위원으로서 [[태백산]] 지구를 통해 남하, 먼저 침투했던 제3병단의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2개월간 국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0일경 태백산 지구에서 국군 및 경찰 토벌대와의 교전 중 사살되었다.[*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1949년 12월 4일자에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했다'는 육군총참모장의 발언을 인용한 보도가 있었다.] == 매체에서 ==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했던 [[이태]](李泰)는 저서 '[[남부군]]'에서 박치우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180명을 유격대로 편성해서 1948년 11월 [[오대산]] 지역에 침투시켰고 박치우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6개월 동안 약 600명의 유격대원이 추가로 투입됐지만 이들 대부분은 사살되거나 도주했다. == 평론/저술 == * 현대철학과 인간문제 (조선일보, 1935.9.3.∼11.) * 세대 비판의 완성으로 (조광, 1937.1.) * 고문화 음미의 현대적 의의 (조선일보, 1937.1.1.∼3.) * 고전의 성격인 규범성 (조선일보, 1938.6.14.) * 예지(叡智)로서의 지성 (비판, 1938.11.) * 전체주의 철학적 해명 (조선일보, 1939.2.) * 교양의 현대적 의미 (인문평론, 1939.11.) * 지식인과 직업 (인문평론, 1940.5.) * 동아협동체론(東亞協同體論)의 일성찰(一省察) (인문평론, 1940.7.) * 사상과 현실 (백양당, 1946. 11. 20.) [[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1909년 출생]][[분류:1949년 사망]][[분류:북한의 인물]][[분류: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출신]][[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인문대학]][[분류:김책시 출신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