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군사혁명위원)] ||<-2> '''{{{+2 박창암}}}[br]朴蒼巖'''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박창암3.png|width=100%]]}}} || ||<|2> '''출생''' ||[[1923년]] [[5월 15일]]|| ||[[함경남도]] [[북청군]]|| || '''사망''' ||[[2003년]] [[11월 10일]] (향년 80세)|| || '''본관''' ||[[박(성씨)|경주 박씨]]|| || '''호'''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 '''학력''' ||연길사범학교|| || '''경력''' ||[[간도특설대]][br][[건국동맹]] 군사분맹[br][[군사영어학교]] 제1기[br][[조선인민군]][br][[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 || '''최종계급''' ||준장 {{{-2 (대한민국 육군)}}}||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유사역사학자. 본관은 [[박(성씨)|경주]](慶州)[[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23_1_0031069&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호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 생애 == 1923년 5월 15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출생했다. [[연길시|연길]]의 연길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있다가 1943년 [[만주군]]의 [[간도특설대]]에 입대하였다.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에도 불구하고 박창암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중국]] [[허베이 성]]에서 [[만주군]] [[하사관]]으로서 만군 조종사 [[박승환(군인)|박승환]]이 주도한 항일 조직인 [[건국동맹]] 군사분맹에 가입하여 활동했기 때문이다. 1945년 월북하여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제1기로 입교하였다. 같은 해, 북파되어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에 관여하고 인민군 수뇌부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48년 북한을 탈출, 1949년 육군 중위로 특별임관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 특수부대인 육군본부 직할 특수부대 9172부대 근무하였다. 1952년 미국 특수전학교를 수료하고 같은 해 항일 공산 게릴라 전문 토벌 부대 간도특설대의 경험을 살려 제주도 [[공비]] 토벌을 지휘하였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에서 [[사관생도]]의 혁명지지를 선동하였고, 이러한 조력을 토대로 쿠데타가 성공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1월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1963년 혁명공약에 따른 원대복귀를 요구하다 [[김동하(군인)|김동하]], [[박임항]] 등과 함께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1968년부터 반공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월간 《자유》를 발간하였다.[* 당시 '자유'지에 '예비군방위의 절대치'를 기고해 [[김대중]]의 예비군 폐지 공약에 반박한 [[장호강]]은 박창암의 반혁명사건 시절 심판관을 맡은 인연이 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양주시|양]][[동두천시|주]][[남양주시|군]][[구리시|-]]파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박명근]] 후보와 친여 무소속 [[이진용(1920)|이진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6년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 국사찾기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유립]]을 통해 가짜 역사서인 [[환단고기]]를 전파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는 일제의 [[만선사관]]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의 군인으로서 일본의 여러 중국으로부터 만주를 분리하기 위한 역사 작업들을 접할 기회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동북공정]][* 동북공정의 기원은 일본의 만주 분리 작업을 위한 역사 연구에 대항한 중화민국의 민족지 연구이다.]같이 역사를 활용한 최초의 국가가 일본이라는 점과, 친일파 [[최남선]]이 환빠들과 같은 실지회복주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 주권과 순수성-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프래신짓트 두아라 지음, 한석정 옮김]은 이런 그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2003년 11월 10일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가족 ==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박청권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대령을 지냈으며 그 아들인 박정식 또한 [[학생군사교육단|학군]]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하여 3대째 장교로 임관했다. 차남 박청인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나와 [[뉴욕 주립대학교]] 환경임학대학(SUNY-ESF)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분류:북청군 출신 인물]][[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간도특설대 출신]][[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6.25 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유사역사학자]][[분류:경주 박씨]][[분류:군사혁명위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1923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