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논산시 출신 인물]][[분류:1885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박창래}}}[br]朴昶來, 朴昌來'''}}}}}} || ||<|2> '''출생''' ||[[1885년]] [[3월 3일]] || ||[[전라도]] [[전주시|전주부]] 양량소면 양촌리[br](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 || ||<|2> '''사망''' ||[[1959년]] || ||[[만주]]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창래는 1885년 3월 3일 전라도 전주부 양량소면 양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만주 연길현 상의사 태평구로 이주하여 사립 동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1920년 3월 1일 동성학교와 팔도구(八道溝)의 학생 약 70여 명을 인솔하고 팔도구 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경에는 재만 독립군단인 의민단(義民團)에 가입하였다. 이후 1920년 5월 말 의민단의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동지 수명과 함께 북간도 모록구(母鹿溝)에서 이주 한인 재산가들을 방문해 7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곧 일경에 포착되어 박창래를 비롯한 대원 다수가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로 압송되어 1920년 10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에 관한 범죄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다 1959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박창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