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정치인, rd1=박중화(정치인))]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박중화}}}'''[br]'''朴重華'''}}}}}} || ||<|2> '''출생''' ||[[1878년]][* [[http://db.history.go.kr/id/im_106_01030|1927년 작성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1912년 당시 35세였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0&evntId=0034975210&evntdowngbn=Y&indpnId=000000737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7년 3월 31일 판결문]]에 40세로 기재되어 있다.] [[2월 3일]][*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0&evntId=0034975218&evntdowngbn=Y&indpnId=000000737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7년 10월 12일 판결문]]] || ||[[경상도]] [[경주시|경주부]][br](현 [[경상북도]] [[경주시]]) || ||<|2> '''사망'''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중화는 1878년 2월 3일 경상도 경주부(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191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수하동(서울)|수하정]](현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수하동(서울)|수하동]]) 18번지[* 그가 살았던 수하동 18번지는 현재 수하동 67번지에 편입되었으며, 이곳에는 [[미래에셋금융그룹]] 본사가 위치한 미래에셋센터원 빌딩이 위치해있다.]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0&evntId=0034975214&evntdowngbn=Y&indpnId=000000737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거주했고]], 192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청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 187번지[* 현재는 사라진 지번이다. 다만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508323&docid=0050402722&mngno=BJCA000136&type=12&want=1&formType=keyword&rtURL=%2facreage%2flistKeywordSearch.do%3fpage%3d3%5ekeyword%3d%25EC%25B2%25AD%25EC%25A7%2584%25EB%258F%2599%5earch_tp_id%3d12|1912년 작성된 지적원도]]를 참조하면, 청진동 [[https://naver.me/5IlPxFPI|184-1번지]]와 [[https://naver.me/GoB8rOy9|188번지]]에 각각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청진동 184-1번지에 있는 삼송빌딩에는 한때 [[한겨레민주당]] 중앙당 사무실이 있었고, 청진동 188번지에 있는 시그나타워에는 [[라이나생명]]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에 [[http://db.history.go.kr/id/im_106_01030|거주했다]]. 189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0년에는 [[시즈오카현]]립중학교, 1903년에는 시즈오카농학교에 입학하여 각각 수학하였다. 이 동안에 카도타(門田) 타케치라는 일본인 여성과 동거하며 슬하에 박옥자(朴玉子)·박겸자(朴兼子) 등 두 딸을 두었다. 귀국 후에는 [[경성부]] 청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에 거주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87|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그는 이에 가입하여 주로 [[한성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 신민회의 합법적 청년단체로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될 때 그는 발기위원으로서 참여하였으며, 이후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회장을 거쳐 청년학우회 제2대 회장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이즈음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중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구국운동에도 진력하였다. 한편, 같은 해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함께 조직하여 당원으로서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1909년부터 1916년까지는 [[휘문고등학교|휘문의숙]] 교장에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당시 [[조선총독부]]로부터 발매 및 반포가 금지되었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5142|대한역사]](大韓歷史) 교과서를 가르치는 등 조선인으로서 [[한일합병]]의 역사를 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항상 독립사상 및 반일사상을 [[http://db.history.go.kr/id/im_106_01030|고취했다]]. 그러다가 1917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421|감익룡]](甘翊龍)과 함께 자산가의 청년 자제들을 유인, 김규묵(金奎默)이 조제한 자양강장제를 본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팔아 그 이윤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을 계획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 해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사기 혐의로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0&evntId=0034975210&evntdowngbn=Y&indpnId=000000737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사기 취재 혐의로 징역 10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0&evntId=0034975214&evntdowngbn=Y&indpnId=000000737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여 그해 10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사기 혐의에 대해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0&evntId=0034975218&evntdowngbn=Y&indpnId=000000737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 중 본인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고]], 사기 혐의에 대해 결국 [[무죄]]를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그후 1920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604|김명식]](金明植)·박이규(朴珥圭)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노동운동을 지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소명하기 어렵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878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