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 {{{+1 박주석}}}[br]朴周錫}}}'''}}} || || '''이명''' ||박명수(朴明洙, 朴命洙)·박처사(朴處士) || || '''법명''' ||태수(泰洙) || ||<|2> '''출생''' ||[[1864년]] [[2월 17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br](현 [[경상북도]] [[안동시]])[*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80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001&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수형인명부]]에는 전남 제주도 구우면 금악리는 주소지, 전남 진도군 동면 상리는 출생지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전라남도 진도군 동면 상리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지명이며, 외손자 이태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본디 안동 사람이라고 한다.[[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5|#]]] || || '''사망''' ||[[1921년]] [[7월 24일]] (향년 58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승려]],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주석은 [[1864년]] [[2월 17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외손자 이태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박주석은 14세 되던 해에 [[사명대사]]와 연관이 깊은 [[금강산]]의 한 사찰[* 사명대사와 연관이 깊은 금강산의 사찰로는 [[서산대사]]와 도술을 시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안사(長安寺),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표훈사(表訓寺), 사명대사가 35살 때 3년간 수도를 했다는 보덕사(普德寺), 사명대사 기적비가 발견된 [[고성군(강원도)|고성]] [[건봉사]](乾鳳寺), 임진왜란 발발 당시 머물러 있었던 유점사(楡岾寺) 등 여러 곳이 있기 때문에, 특정하기 어렵다.]로 스님을 따라 들어가 출가한 후, 그곳에서 불법과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금강산 사찰에서 수학하던 [[1907년]], [[정미 7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일어나 이에 대한 반발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항쟁에 뛰어들어 활동하면서 [[경상북도]] 안동과 [[경상남도]] [[진주시|진주]] 등지에서 박처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하며, 이후 호남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문태수]]로부터 '태수(泰洙)'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https://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6|#]] 이 때문에 이태수씨는 외조부를 [[1908년]]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피살되었다는 또다른 독립유공자 [[박처사]](朴處士)와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기도 했지만, 동일인물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한금순,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 『대각사상』제9집, 대각사상연구원, 304p.] 어쨌든 박주석은 이후 신분을 숨기고 [[제주도]]로 건너왔다고 하며, [[전라남도]] [[대정군]] 좌면 도순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의 법정사에서 수도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더 돈독하게 다졌으며,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독립운동가)|강창규]]·방동화(房東華)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박주석을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같은 해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립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하였는데, 이 때 박주석은 도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조직 편성 후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법정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의 이장들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박주석 등은 일본 경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줄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리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으며,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체포되었으며, [[1918년]] [[7월 29일]] 소위 소요 혐의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04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662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80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001&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21년]] [[7월 24일]]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승려]][[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1864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옥사한 인물]][[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