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의열단)]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박재혁}}}[br]朴載赫 | Park Jae-hyuk'''}}}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박재혁 의사.png|width=100%]]}}} || ||<|2> '''출생''' ||[[1895년]] [[5월 17일]]|| ||[[조선]] [[경상도]] [[기장군|동래군]] [[동면]] 범일동리[br](현재 [[부산광역시]] [[동구(부산광역시)|동구]] [[범일동]])[br] || ||<|2> '''사망''' ||[[1921년]] [[5월 27일]] (향년 26세) || ||[[경상북도]] 대구형무소|| || '''학력''' ||[[부산개성중학교]] {{{-2 (졸업)}}}[br][[부산개성고등학교]] {{{-2 (졸업)}}}|| ||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한국]]의 [[의열단]] 출신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 생애 == [[1895년]] [[5월 17일]]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부산광역시)|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항일 단체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개성고등학교|부산공립상업학교]] 졸업 후에는 무역상 일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당시 의열단에서는 일명 '진영사건(進永事件)'에 독립운동가들이 연루되어 계속 부산경찰서에 붙잡혀 [[고문]] 및 투옥되자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부산경찰서장을 암살하기로 계획하였다. 마침 의열단에 가입했던 박재혁을 눈여겨 본 의열단장 [[김원봉]]의 권유로 부산경찰서[* 이 부산경찰서는 지금의 [[중구(부산광역시)|중구]] [[동광동]]2가 10-5 소재. 폭파 의거 후인 1924년 지금의 [[대창동]] 부산중부경찰서 자리로 이전하였다.] 폭파 의거를 결정하였다.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던 박재혁은 김원봉의 호출을 받아 [[상하이시|상하이]]에서 지시를 받고 일본 [[나가사키시|나가사키]]와 [[쓰시마 섬|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잠입하였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은 하시모토 서장의 취미가 고서적 수집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중국인]] 고서적 상인을 가장하여 부산경찰서를 찾아갔다. 예상대로 하시모토 서장은 면회를 승낙하였고 박재혁은 그 자리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하시모토 서장은 중상을 입은 뒤 사망하였고 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일본인]] 경찰관 2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박재혁도 폭탄의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박재혁은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전에 경찰의 고문과 파편에 입은 상처로 고통받았다. 그래서 옥중에서 자결하기 위해 단식했는데 이 과정에서 폐병에 걸려 사형이 집행되기도 전인 [[1921년]] [[5월 27일]] [[대구광역시|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형편이 뜻대로 되어가니, 이 모든것이 그대가 염려해 준 덕분인듯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김원봉|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 김원봉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 기타 ==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2012년 7월 부산광역시 동구청에서는 그의 생가가 있는 조방로 630m 구간을 '박재혁거리'로 명명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95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동구(부산) 출신 인물]][[분류:부산개성중학교 출신]][[분류:개성고등학교 출신]][[분류:아사한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옥사한 인물]][[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의열단/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