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두산 회장)] ||<-2> '''두산그룹 제3·5대 회장[br]{{{+1 박용곤}}}[br]朴容昆 | Park Yong-go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박용곤.jpg|width=100%]]}}}|| ||<|2> '''출생''' ||[[1932년]] [[4월 17일]] || ||[[경기도]] [[경성부]][br](現 [[서울특별시]]) || || '''사망''' ||[[2019년]] [[3월 3일]] (향년 86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본관''' ||[[밀양 박씨]] || || '''학력''' ||[[경동고등학교]] {{{-2 (졸업 / 7회)}}}[br][[워싱턴 대학교]] {{{-2 (경영학 / 학사)}}} || || '''부모''' ||아버지 [[박두병]] 어머니 명계춘 || || '''형제자매''' ||여동생 박용언[br]남동생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기업인)|박용만]], 박용욱 || || '''배우자''' ||이응숙{{{-2 (1936년생, 1996년 사별)}}}|| || '''자녀''' ||장남 [[박정원]][br]장녀 박혜원[br]차남 박지원 || || '''수상''' ||은탑산업훈장 (1984)[br]금탑산업훈장 (1987)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기업인]]. [[두산그룹]] 제3·5대 회장. == 생애 == [[1932년]] [[4월 17일]],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박두병]]과 [[어머니]] 명계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으로는 박용언[* 여동생, 김세권 전 [[대검찰청]] 차장의 부인.],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기업인)|박용만]], 박용욱이 있다. [[경동고등학교]](7회) 졸업반 때 [[6.25 전쟁]]이 터지자 [[졸업]] 후 [[대한민국 해군|해군]]에 입대했다가 [[의병전역]]했다.[* 6.25 당시 통신병으로 비밀훈련을 받고 암호취급 부서에 배치돼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한 바 있어 참전의 유공이 인정돼 2014년 [[국가유공자]]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고 [[워싱턴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이후 바로 귀국해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하였고[* 유학 이후 두산그룹에 바로 입사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 [[박두병]]의 지론 때문이었다. [[박두병]]은 아들 박용곤에게 "남의 직장에서 남의 밥을 먹으며 지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수 있고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1963년 아버지 [[박두병]]의 부름을 받아 [[OB맥주|동양맥주]]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게 되는데 입사 당시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닦기였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가 [[구자경(기업인)|구자경]] [[LG|LG그룹]] 명예회장이다. LG를 창업한 [[구인회(기업인)|구인회]] 회장은 교사로 일하던 아들 구자경을 [[LG화학|락희화학]]에 입사시켰는데 첫 업무가 공장 잡일 처리였다고 한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이사, 동양맥주 대표이사 부사장을 지내게 된다. 이후 두산산업 사장 및 회장, 합동통신[*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통신사. 이 통신사의 후신이 바로 [[연합뉴스]]의 전신인 연합통신이다.] 사장을 지내면서 경영수업을 쌓는다. 1981년 [[두산그룹]] 회장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는 1973년 박두병 회장의 사망 때 회장직을 승계하리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당시에는 두산그룹 창업공신인 정수창에게 양보하고 1.5인자로 있었다.] 1991년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으로 인해 2년 간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1993년 복귀했고, 1995년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주력이었던 식, 음료 비중을 낮추고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해 33개에 이르는 계열사 수를 20개로 재편했다. 그룹 창업 100주년이 되는 1996년에 동생 [[박용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2019년 3월 3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7세. 장지는 경기도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 경력 == * 1960. 한국산업은행 입행 * 1966. 한양식품 대표이사 사장 * 1973. 동양맥주 대표이사 부사장 * 1974. 두산산업 및 ㈜합동통신 대표이사 사장 * 1978. 두산산업 대표이사 회장 * 1993. 두산그룹 회장 * 1996. 두산그룹 명예회장 * 2008. 중앙대학교 이사 == [[범두산가|가족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범두산가)] == 여담 == * 상당한 [[야빠]]다. [[OB 베어스]]-[[두산 베어스]]의 초대 구단주이기도 했고 두산 홈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야구장]]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잠실 야구장 중앙 출입구 한쪽에 박용곤을 위한 전용 주차공간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이용했던 차량은 [[마이바흐]]였다. 그래서 박용곤이 별세한 후 야구계는 대대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 야구 만큼이나 [[골프]]도 굉장히 좋아했는데, 선친 [[박두병]] 회장이 한국골프협회 회장을 맡은 이후 집에서 배운 골프 실력으로 두산그룹 산하의 '''라데나 골프클럽'''을 운영하면서 대기업 회장들과 친목을 다졌다고 한다. * 골프에 대해서는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있지만, 골프의 매너를 중시해서 상대방이 칠 때 비매너 행위[* 일부러 상대 선수가 있는데 잡담을 하거나, 러프에서 볼을 슬쩍 꺼내 다시 치는 경우.]를 보이는 사람에게 "골프는 그렇게 치는 거 아니다!" 라고 면전에 대고 말한다거나, 클럽 라운지 등에서 샤워실이나 카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매너가 없다면서 자리를 떴다고 한다. [[한국경제]] 에서 재벌 총수들을 대상으로 골프 사랑에 대한 인터뷰를 할 때 다들 입을 모아 '''박용곤 회장은 아무리 중요한 사람이라도, 골프를 치며 스코어를 속이거나 룰을 어기면 두 번 다시 상종도 안했다''' 라며 증언할 정도였다. 박 회장은 생전에 우리나라 골프 인구가 늘면서 다들 기량도 좋아졌지만 매너는 더 형편 없어졌다면서, 벙커샷 이후 뒷 정리도 제대로 안한 채 모래 투성이로 클럽하우스 식당이나 목욕탕을 멋대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혐오한다고 밝힌 바 있다. * 외부에 드러난 5세 중에서 박용곤의 세 자녀에게만 각 아들이 있다고 하니 두산가의 형제상속 전통이 후사로 육촌, 팔촌대까지 계승될수 있을지 아직까지 먼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주목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 [[OB 베어스]] 단장과 사장을 지낸 '''박용민'''은 이름 때문에 박용곤의 형제 내지는 인척인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그는 두산 계열 언론사 [[연합뉴스|합동통신]] [[기자]] 출신으로 박용곤 회장의 큰 신임을 받던 부하 직원일 뿐이었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932년 출생]][[분류:2019년 사망]][[분류:범두산가]][[분류:기업인 자녀]][[분류:경동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