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본명이 박영종인 시인, rd1=박목월)] [include(틀:제3대 국회의원/전라남도)] [[파일:external/people.phinf.naver.net/yonhapnews_33676966.jpg|width=150]] 朴永鍾 1917년 2월 19일 ~ 1959년 4월 28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1917년 [[전라남도]] 광주군(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남지부에서 활동하다가 [[대한청년단]] 전남도단 부단장을 지내며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서울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호남신문]] 편집국장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담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선민족청년단]] [[정균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홍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김문용]]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제3대 국회에서 달변가로 유명하였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군 선거구의 [[강세형]] 국회의원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에 의해 낙선된 [[김문용]]의 자형이 강세형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 초 모종의 사유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1957년 다시 민주당에서 제명되고 [[김준연]]과 [[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국쾌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제3대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무려 '''450회'''나 발언하여 가장 많은 발언을 한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3/0000025787?sid=100|참고]] [[1959년]] [[4월 28일]], 지병인 간장염으로 인해 만 42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9042900329201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4-29&officeId=00032&pageNo=1&printNo=4323&publishType=00020|#]]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1917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분류:민주당(1955년)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통일당 국회의원]][[분류:광주광역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