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3대 국회의원/전라북도)] [include(틀:제4대 국회의원/전라북도)] [[파일:external/rokps.or.kr/533.jpg|width=150]]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chosun_400004325.jpg|width=150]] 朴世俓 [[1919년]] [[8월 29일]] ~ [[1996년]] [[9월 18일]] 본관은 [[함양 박씨|함양]](咸陽). 혈액형은 [[A형]]으로 추정된다. 아들 박정훈이 [[A형]]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정치인]]이다. 아들 [[박정훈(정치인)|박정훈]]은 제14대, 15대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민주당(1991년)|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을 역임하였다. 1919년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인근의 성가리와 함께 [[함양 박씨]]의 집성촌이다.][[http://tour.imsil.go.kr/?imsil=4O2OO&mode=read&uid=10&start=0|#]]에서 태어났다. 임실공립보통학교(현 임실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고등문관시험#만주국 고등관고시|만주국 고등관고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대한국민당]] 중앙감찰위원, 대한청년단 전북도단 부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북도 임실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 전라북도당 훈련부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다시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곽의영]]의 변호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자유민주당(1963년)|자유민주당]], [[신민당(1967년)|신민당]] 등의 야당에 몸담으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는 다른 구 자유당 인사들이 민주공화당 쪽으로 가거나 신민당 [[이철승계]]나 [[유진산계]]로 이동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아들 박정훈과 같이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같이 해금되어서 부자 해금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85년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1%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B%B0%95%EC%84%B8%EA%B2%BD%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85-01-01%22%2C%22endDate%22%3A%221985-12-31%22%7D|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대법원 판결이 내려져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이 때 [[이회창]], [[이일규]] 대법관 등은 소수의견을 제안했으나 무산되었다. 1987년 사면, 복권되어 변호사 자격을 되찾았다. 이후 정치적으로 [[김대중]]을 후원하였다.[* 반면 그가 변호했던 [[곽의영]]은 나중에 박정희 때 친여인사가 되었다.] [[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제4대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임실군 출신 인물]][[분류:1919년 출생]][[분류:1996년 사망]][[분류:함양 박씨]][[분류:만주국 고등관고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