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파일:박동서.jpg]] 朴東緖 [[1929년]] [[7월 24일]] ~ [[2006년]] [[6월 26일]]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행정학자. 한국 행정학의 최고 원로 중 하나. [[서울대학교/대학원#s-2.2|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생애 == [[1929년]] [[서울|경성]] 출생.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박정양]]의 손자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경기중학교]]를 거쳐, 해방 후인 [[서울대학교]]의 마지막 [[대학예과|예과]][*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은 우선 예과를 선발한 다음, 2년제 예과를 거친 학생들이 3년제 학부과정을 진학하는 교육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예과 제도는 경성대학이 폐지되고 타 [[구제전문학교]]와 통합된 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폐지되는데, 박동서는 폐지 직전인 1946년 경성대학 예과(23회)에 합격하였다. 예과 23회 동기로는 [[신형식]] 전 건설부 장관, 고정간첩으로 적발된 [[고영복]]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있다.]를 거쳐, [[1953년]]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학부 재학 중에는 [[정인흥]]에게 사사하여 행정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의 지도 하에 인사행정을 주제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의 대한 교육 원조 계획인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이 개시됨에 따라, [[미네소타 대학교|미네소타대]]로 유학, [[1962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 학위 취득 전인 [[1957년]]에는 법과대학 행정학 담당 교수로 임용되었고, 이후 신설된 [[서울대학교/대학원#s-2.2|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로 옮겨 정년 퇴임 전까지 재직하였다.[* 초기에 행정대학원은 독립된 대학원이 아닌 법과대학의 부속기관이었으나, 1961년 이후 별도의 기관으로 분리되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창설 요원이기도 한 그는 학자로 활동하면서 정치학, 행정학계의 원로로 활동하였다. [[1973년]] 한국행정학회 회장, [[1978년]] 한국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서울대학교 퇴임 후인 [[1993년]]에는 정부 소속 행정쇄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화 이후 정부조직 개편을 비롯해 과도기 한국 정치행정의 방향 설정에 기여하였다. [[2006년]] 별세. == 연구 == [[1960년대]]에는 이른바 발전행정론을 적극적으로 한국 학계에 도입하여, 경제발전 및 행정 근대화에 필요한 요건을 타국과의 비교를 통해 제시하였다. 특히, 정인흥 등 선배 정치, 행정학자와 달리, 1970년대의 본격적인 경제 성장, 1980년대 말의 민주화 등을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단순 미국 이론의 유입에서 벗어나 한국 정치현상 및 행정현상의 설명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다. 저서 역시 개론 교과서인 『행정학』(1962년)을 비롯해,『한국행정론』(1972년), 『한국행정의 발전』(1981년), 『한국행정의 쇄신 사례』(1998년), 『장관론』(2003년) 등 발전행정, 한국의 관료제 등에 대한 저서가 많다.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정치학자]][[분류:1929년 출생]][[분류:2006년 사망]][[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