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 비정통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비정통 국왕[br]{{{+1 밀풍군 | 密豊君}}}[* 봉호는 [[경상남도]] [[밀양시|밀양]]에서 유래했으며 초직은 밀풍정(密豊正)이었다가 도정을 거쳐 1710년에 군(君)으로 봉해졌다.][* 1864년 죄명 삭제, 18일 관작 회복.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 후술.]'''}}}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밀풍군 이탄묘.jpg|width=100%]][br]{{{-2 밀풍군묘}}}}}} || ||<|2> '''출생''' ||[[1698년]] [[4월 8일]][br](음력 [[2월 28일]]) || ||장소 미상|| ||<|2> '''사망''' ||[[1729년]] [[4월 25일]] (향년 31세)[br](음력 [[3월 28일]])|| ||장소 미상|| ||<|2> '''능묘''' ||밀풍군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 ||<|2> '''재위기간''' ||'''{{{#ffd400 비정통 국왕}}}'''|| ||[[1728년]] [[3월 15일]] ~ [[1728년]] [[3월 24일]][*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 세력에게 추대받았다.][br],,(9일),, || || '''본관'''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 3대손.] || || '''휘''' ||탄(坦) || || '''부모''' ||아버지 [[임창군|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br]어머니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 || '''형제자매''' ||6남 5녀 중 장남 || || '''부인''' ||군부인 [[청풍 김씨]] (淸風 金氏)[br]군부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 || '''자녀''' ||5남 4녀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탄(李坦),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소현세자]] 이왕의 증손으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이며,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임창군 이혼]]의 장남이 밀풍군(密豊君)이다. == 생애 == [[현종(조선)|현종]] 때 경안군이 복권된 이후, [[효종(조선)|효종]]의 후손인 현종과 숙종, 경종은 물론 영조까지도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왕실에서 상당히 잘해주었다. 석견의 두 아들은 한때 역모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지만 풀려났고, [[경종(조선)|경종]] 실록에서 〈[[임창군]] 졸기〉에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향으로 석견의 장손인 밀풍군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며 옹정 원년 사은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오는등 꽃길만 걸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을 때, 반란의 주동 세력이 밀풍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이 밀풍군을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 사실 밀풍군의 위치가 정말 애매하긴 했다. 숙종은 소현세자의 자손들을 복권했으므로, 경종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족보상 같은 항렬이라곤 하지만 어쨌든 소현세자의 장손으로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던 밀풍군이 양자로 입적되거나, 직접 임금이 되지는 못해도 맏아들이 경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흥선대원군]] 두갑자 전에 살아생전 '밀풍대원군'이 될 수도 있었다. 밀풍군은 경종과는 열 살, [[영조]]와는 네 살 차이였으며, 경종이 즉위한 1720년 당시 스물셋이었다. 그리고 결국 8년 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면서 "영조는 가짜고 밀풍군이 진정한 경종의 양자로 대를 이을 자손이다!"라는 주장이 터져나오는 것. 그러나 밀풍군은 반란군이 추대했다는 점 외에는 스스로 역모를 꾀할 의사도 없었기에, 사실상 본인도 이인좌의 난에 휘말린 거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영조 역시 밀풍군이 억울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 이후로 신하들이 밀풍군은 물론 그의 일가를 모조리 탈탈 털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댔지만, 영조는 목이 메어 하교를 못 할 정도로 슬피 울며 상소를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떠밀리듯이 밀풍군에게 자진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처(自處)하는 것으로 써 내도록 하라." 하고,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법(法)이란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법이고 나 한 사람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마는 옛날 제왕(帝王)이 이러한 곳에 대해 보전할 수 있는데도 잘 처리하지 못한 경우를 두루 보고서 마음속으로 늘 개탄해 왔다. 나의 덕(德)이 적은 것으로 인해 친족(親族)에게 돈목(敦睦)하는 교화가 나라에 행해지지 아니하여 흉적(凶賊)으로 하여금 구실로 삼게 만들었으니, 통한(痛恨)스런 나머지 목이 메어 능히 다 유시(諭示)할 수가 없다." >하고, 이탄(李坦)이 자진(自盡)할 때 독촉하지 말며 비록 검험(檢驗)하는 것이 구례(舊例)라 할지라도 단지 부관(部官)·의생(醫生)·부리(府吏)만 들어가 검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 영조 5년 3월 28일 기사 밀풍군은 그렇게 서른 둘의 나이로 자살했고, 그의 막내동생 [[밀운군|밀운군(密雲君)]]마저 나중에 또 다른 역모[* [[나주 괘서 사건]]으로 죽은 소론 준론 심정연(沈鼎衍)의 조카인 심내복(沈來復)이 연좌제로 유배되어 있던 중 역모를 꾀하였는데 이때 밀운군을 추대하기로 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908027_001|#]]]에 연루되면서 죽었다. 자세한 내용은 [[밀운군]] 문서 참조. 이 때가 [[소현세자]]계 후손들의 최대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 [[임창군]]이 6남 5녀를, 본인도 5남 4녀를 둔 자식부자였다는 점이다. == 복권 == 1864년(고종 1년 7월 11일 죄명 삭제, 18일 관작 회복)에 복권되었다. == 가족 관계 == * 부 :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1663 ~ 1724) * 모 :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凝川郡夫人 宻陽 朴氏, ? ~ 1721) - 박징(朴澂)의 딸 * 정부인 : 군부인 [[청풍 김씨]](郡夫人 淸風 金氏) * 계부인 : 군부인 [[조(성씨)|임천조씨]](郡夫人 林川 趙氏) * 장남 : 이관석(李觀錫) * 며느리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신사적(申思廸)의딸 * 손자 : 이복형(李復亨) * 손자 : 이득형(李得亨) * 손자 : 이덕형(李德亨) * 차남 : 상원군 이공(商原君 李糿, 1715 ~ 1733) - [[연령군]]에게 출계된 뒤 공(糿)이라는 이름을 받음. 사후 아버지와 형이 [[이인좌의 난]]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영조]]에 의해 파양됨 * 3남 : 이항석(李恒錫) - 밀원군 이용(密原君 李墉)에게 양자로 출계 * 4남 : 이겸석(李謙錫) * 며느리 : [[김해 허씨]](金海 許氏) - 허지(許沚)의 딸 * 5남 : 이익석(李益錫) * 며느리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지(沈址)의 딸 * 장녀 : [[풍양 조씨|조기명]](趙虁命)에게 출가 * 차녀 : [[은진 송씨|송유]](宋瑜)에게 출가 * 3녀 : 임도원(林度遠)에게 출가 * 4녀 : 김상필(金商弼)에게 출가 === 후손 === 밀풍군의 차남 이진석(李晉錫)은[* 이상대(李尙大)로도 알려져 있다.]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기 전 [[경종(조선)|경종]]의 양자입적으로 거론됐다가[* 촌수를 따지면 경종과는 9촌 숙부 - 조카 사이다.] 최종적으로 [[숙종(조선)|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상원군(商原君)에 봉해졌지만, 후손이 없었기에 파양당했다고 한다.[* 간혹 아버지 밀풍군이 역모에 연루된 것 때문에 파양됐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데, 실제로 신하들이 그렇게 하자고 얘기를 했으나 영조가 따르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906021_001|#]] 결국 상원군이 죽은 1주일 후에야 후손을 다시 세우라는 얘기가 나온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906028_003|#]] 다만, 진짜 후손이 없어서 문제였다면, 상원군 밑으로 다른 양자를 들이면 되는 것을 굳이 파양한 것을 보면 밀풍군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기도 하다.][* 1874년 판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을 보면, 상원군의 사후 양자로 [[덕흥대원군]]의 9대손인 이철존(李喆存)을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하지만 사후에도 군(君)이라는 작위를 추증받지 못함). 그렇지만 이철존에게도 아들이 없어서 [[의안대군 이화|의안대군(義安大君)]]의 17대손인 이기중(李杞重, 족보 명은 이하익(李夏翼))을 양손자로 들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삼남 이항석(李恒錫)은 밀풍군의 동생, 즉 숙부인 밀원정 이용(密原正 李墉)의 양자로 갔는데 이항석의 증손자 이명섭(李明燮)과 이명혁(李明赫)은 [[철종(조선)|철종]] 시기 또 역모에 연관되어 다시 한 번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 했다. 이명섭, 이명혁의 동생인 이교응(李敎應)의 손자 이한용(李漢鎔)은 [[철종(조선)|철종]]의 형 [[영평군(1828)|영평군]]의 손자로 입적되어 [[풍선군]]으로 봉해졌다.[* 여담으로 [[풍선군]]은 친자식을 얻지 못해 [[덕흥대원군]]파 출신 [[청풍군(1890)|청풍군]]을 양자를 삼고 [[청풍군(1890)|청풍군]]은 친아들을 낳게 된다. [[청풍군(1890)|청풍군]]의 손자가 호텔 그랜트힐튼서울 회장 이우영이다.] == 대중매체 == * [[서동원(1979)|서동원]] - 2016년 [[SBS]] 《[[대박(드라마)|대박]]》 * [[정문성]] - 2019년 [[SBS]] 《[[해치(드라마)|해치]]》 == 둘러보기 == [include(틀:이인좌의 난)] ---- [include(틀:조선 왕실)]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비정통 군주]][[분류:1698년 출생]][[분류:1729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소현세자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