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영국 북아일랜드의 영국 연합주의·보수주의 정당, rd1=민주연합당, other2=2008년에 창당된 대한민국의 원외 정당, rd2=민주통일당(2011년))] [include(틀:제10대 국회의 원내 구성)] ||<-2> [[파일:민주통일당.svg|height=50]] || ||<-2> {{{#000 '''민주통일당'''}}} || || '''공식명칭''' ||민주통일당 (民主統一黨 )|| || '''영문명''' ||Democratic Unification Party || || '''창당일''' ||[[1973년]] [[1월 27일]] ,,([[신민당(1967년)|신민당]]에서 분당),,|| || '''해산일''' ||[[1980년]] [[10월 27일]] ,,([[5.17 내란]]으로 인한 해산),,|| ||<:>'''선행조직'''||[include(틀:신민당(1967년))] ,,([[유진산]] 위주의 당운영에 불만을 품고 분당),,|| ||<:>'''의석 수'''||{{{#!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FAC813 1.2%, #ddd 0%)" {{{#000 '''3석 / 231석'''}}}}}}|| ||<:>'''당 색'''|| {{{#!wiki style="display: inline; background: #FAC813; border: 1px #FAC813; border-radius: 3px; padding: 3px 4px" {{{#000 노란색 {{{-2 (#FAC813)}}}}}}}}} || ||<:>'''당기'''||[[파일:민주통일당(1973년) 당기.svg|width=150]]||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에 존재했던 [[정당]]. 약칭은 [[통일당]]이었다.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반 [[유진산]]계인 [[양일동]][* 골수 진산계였으나 1972년의 제2차 진산 사태 때 진산과 결별하였다.], [[김홍일(군인)|김홍일]], [[장준하]][* 이쪽은 [[국민당(1971년)]]에 참여하기도 했다.] 등이 중심이 되어 ‘야당의 새로운 진로와 좌표정립’을 표방하고 [[10월 유신]] 선포 직후인 1973년 1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창당된 [[민주당계 정당]]이다. 이후 많은 인사들이 신민당으로 다시 넘어가고, 당도 1980년 자동 해산 조치되었다. == 상세 == 창당 대회에서 [[양일동]]을 대표최고위원으로 하였다. 최고위원에 [[윤제술]], [[정현섭|정화암]], [[김선태(1911)|김선태]] 등을 선출하여 집단지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당헌을 채택하였다. 창당 대회에서 창준위의 발기선언문과 내용이 같은 창당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유민주체제를 견지하고 수호해야 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체제가 [[반공주의|공산주의 독재체제]]보다는 우월하고 능률적인 제도임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는 거듭 자유민주체제가 [[반공주의|공산독재]]보다 우월하고도 이상적인 제도라는 정치적 신념을 굳게 파악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토착화와 한국적 민주주의가 제창된 시대적 배경과 그 진수를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인식하고 분석비판하여야 되겠다. 그러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수 양일동을 비롯한 당 간부들이 대거 낙선되고 [[김경인]], [[김녹영]]만이 당선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다만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한 [[박병배]] 후보가 선거 무효 소송에서 재검표 끝에 승소하여 뒤늦게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4년 신민당의 총재 유진산의 사망과 [[김영삼]]의 총재 취임을 계기로 신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76년 1월 통합제의에 대한 김영삼의 거부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1977년 48개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양일동, [[김현수(1937)|김현수]], 김녹영 등 3명만이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록 패하였지만, 민주회복과 평화통일성취 등 2대 목표를 내걸고 1979년 5월 출범한 [[김영삼]] 체제의 신민당과 각종 민주회복투쟁대열에 동참하였다. 1979년 8월 [[YH 사건]]에서 여공들의 농성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하여 신민당과의 무조건 합당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사태[*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전 신민당 당수 이철승계 소속 원외 지구당위원장 [[유기준(1924)|유기준]], [[조일환(1916)|조일환]], [[윤완중]] 등이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자격이 없는 대의원 [[조윤형]] 등이 2명 있었으므로 김영삼의 총재 선출은 무효다"라고 주장하여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때 김영삼을 물먹였던 유기준은 1987년 [[이민우 구상]] 파동으로 [[이철승]]이 몰락하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군(2014년 기준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3당 합당]]까지 따라갔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민정계]] [[정영훈(1932)|정영훈]]에게 밀려 공천 탈락되었다. 사실 유기준 말고도 1970년대 신민당에서 이철승계 정치인이었던 사람들 중 1987년 이민우 구상 파동 때 이철승 대신 김대중계나 김영삼계 정치인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제법 된다.]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등으로 정국경색이 장기화되어 감에 따라 양당통합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1980년 2월 부총재 [[정상구]] 등 30여 명이 신민당에 입당하고, 4월 양일동이 사망함에 따라 당의 운명이 좌초될 상황에 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17 내란]]이 일어났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0년 10월 27일 자동 해산 조치되었다. == 역대 지도부 == [include(틀:민주통일당 대표)] == 둘러보기 == [include(틀:민주당계 정당(제1공화국-제4공화국))] [include(틀:제9대 국회의 원내 구성)] ||<-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8E018, #F8E018)" '''[[민주당계 정당|{{{#000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신민당(1967년)|신민당]]||<:>{{{+1 →}}}||<:>'''{{{#000 민주통일당}}}'''||<:>{{{+1 →}}}||<:>''강제해산''|| [[분류:민주당계 정당]][[분류:보수주의 정당]][[분류:반공주의 정당]][[분류:1973년 정당]][[분류:나무위키 정당 프로젝트]][[분류:1980년 해체]][[분류:한국의 없어진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