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기)][include(틀:역대 송(춘추시대) 군주)] |||||| '''{{{#ece5b6 송(宋)나라 초대 국군[br]{{{+1 미자 계}}}[br]微子 啓}}}''' |||||||||| |||| '''[[성씨|{{{#ece5b6 성}}}]]''' |||| 자(子) || |||| '''[[본관|{{{#ece5b6 씨}}}]]''' |||| 송(宋) || |||| '''[[휘|{{{#ece5b6 휘}}}]]''' || 계(啓) || |||| '''{{{#ece5b6 아버지}}}''' |||| [[제을]](帝乙) 자선(子羡)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 '''{{{#ece5b6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목차][clearfix] == 개요 == [[상나라]]의 왕자로 상나라 제29대 왕 [[제을]]의 아들이며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의 이복형이다.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정실 소생이 아니라서 왕이 되지는 못했다. 미(微)는 영지의 이름이다. == 제후가 되기까지 == 주왕이 [[달기]]를 끼고 폭정을 행하자 주왕의 숙부인 [[기자(중국)|기자]]는 간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미친 척하며 다니다 투옥되고, 마찬가지로 주왕의 숙부인 [[비간]]은 [[처형]]되었다. 이에 상나라에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무왕(주)|주 무왕]]의 편을 든다. 그냥 가지 않고 상의 [[종묘]]에 들어가서 '''왕실의 [[제기]](祭器)를 가지고 나왔는데''', 전근대에 제사라는 의식은 의식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단합 대회로서의 성격도 지녔을 뿐더러, 제사의 목적도 신에게 단순히 풍요를 기원하는 것 외에도 국가에 재앙이 있을 때는 그 재앙에 대해 왕이 직접 나서서 하늘에 사죄하는 의식으로서의 성격도 있었다. 더욱이 제정 일치 사회로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일이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쳐서 결정했던 상 왕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하늘에 고하는 국가예식절차에 차질이 생길 뿐더러 제사라는 구성원들의 회합과 단결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는 하늘에 국가의 풍요를 빌 수도 없고 천재지변에 대한 왕의 잘못을 하늘에 고하고 사죄해 노여움을 풀라고 빌 수도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건 그냥 '''나라 문 닫으라는 저주'''에 가깝다. 주나라는 제왕국이었던 상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주왕의 민심이 기울어진 혼란을 틈타 신하가 왕을 쳐서 영토를 빼앗았을뿐 모든 국가적 문물과 법제등은 속국에 불과했다. 주나라가 나라의 기틀을 다시 새로짜기엔 기존의 것들을 폐하거나 상당한 시간이 요구됐고 상나라의 법제와 문물을 새왕조라는 명분만으로 부정하기엔 모든면에서 주나라보다 우월했기에 주나라는 상나라를 거의 그대로 계승한다. 주왕 축출후 상왕실 구성원중 일부는 왕실의 옛 고향인 동북쪽 한반도 씨족문명의 발원지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자계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지닌 하늘에 제례를 이어가야 하는 장손이며 주왕실과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져있는 정통성 때문에 송나라 초대왕에 봉해지게된다. 송나라는 상나라 천자의 국가로 여전히 예우 받았으며 제례의 특권과 제후국들 모임에서는 주장국으로 상석에서 주관했다. 무왕은 독자적인 통치철학으로 문화혁명을 하려는게 아니었다 따라서 주왕 달기등 폭정의 원흉들만 제거하고 모든걸 그대로 보존했으며 상나라의 거의 모든걸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주왕의 허용으로 미자계의 숙부 기자는 고조선으로 분봉받았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나와있으며 실제로 왕과 내각만 교체됐다고 봐도 무방할정도로 주나라는 상나라를 그대로 계승한다. 후에 상나라 왕족 후손인 [[공자]]도 이점을 높이사서 주나라를 인정하고 특히 주공을 좋게 평했다. 결국 [[주나라]]는 [[목야대전]]에서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스스로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천하가 평정되자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냥 놔둔 것은 아니고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선(鮮), 채숙(蔡叔) 도(度), 곽숙(霍叔) 처(處)[* 각각 관·[[채]]·곽의 제후라는 뜻이며 이름이 선·도·처이다.]를 무경 주변에 봉건해 무경을 감시하도록 했다. 이들을 세 명의 감시자라고 하여 삼감(三監)이라고 부른다.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주)|성왕]]이 즉위하자 [[주공단]]이 섭정했다. 무경은 이 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마침 삼감이 주공에게 불만을 품고 있어 무경에 협력하니 이를 '삼감의 난'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주공단의 편을 들어서 진압에 공을 세웠다. 무경·관숙은 처형, 채숙·곽숙은 추방되었고, 무경에게 할당했던 땅을 인계받게 되는데 이 지역을 [[송(춘추전국시대)|송(宋)]]이라고 한다. 미자계의 자손들은 주나라에 명목상 관리로 가 있었고 사실상 반란 견제 목적인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에는 후사가 없어 송 땅은 그의 동생 [[미중 연]]이 이어받았고, 그래서 이후 송나라의 국군은 모두 연의 후손이다. == 여담 == * [[사기(역사책)|사기]]는 그의 이름을 개(開)라고 적어놨는데 [[한경제]]의 [[피휘|이름이 똑같이 '계(啓)'였기 때문]]이다. * 한국·중국을 통틀어 [[송(성씨)|송(宋)씨]]들의 정신적 시조로 볼 수 있다.[[분류:상나라의 왕자]] [[분류:상나라의 제후]] [[분류:송나라의 군주]][[분류:창업군주]][[분류:서출]] *[[공자]]는 미자계와 같은 상나라와 송나라 왕족의 후손이다 공자의 뿌리는 [[탕왕]]이며 상나라와 송나라 왕실의 조상이다. [[사마천]]에 의하면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왕실 후손으로 대대로 송나라에서 살고있었는데 새 왕을 세우는 시기에 양위를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택한 불보하(弗父何) 대 부터는 왕위 승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불보하의 후손인 공보가(孔父嘉) 대 까지는 송나라에 계속 살았으나 그의 아들인 자목금보(子木金父)가 송나라를 떠날때 아버지의 자(字)인 공보가의 공(孔)만을 따서 이때 부터 공씨로 삼게되었는데 공자는 씨(氏)만 다를뿐 미자계의 자성 송씨와 같은 자성 공씨 왕실 종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