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이란의 건축가]][[분류:이란의 정치인]][[분류:1942년 출생]][[분류:동아제르바이잔 주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총리)] میرحسین موسوی خامنه 1942.3.2 ([age(1942-03-02)]세) ~ == 개요 == [[이란]]의 건축가 출신 정치인으로, 제49대이자 마지막 총리를 지냈다. == 생애 == [[하메네]]에서 [[타브리즈]] 출신의 [[아제리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훗날 최고지도자가 되는 [[알리 하메네이]]의 친척인데, 후술하겠지만 둘의 관계는 매우 나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테헤란]]으로 이주해 테헤란 국립 대학교(현 [[샤히드 베헤슈티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하지만 무사비는 건축가의 길을 걷는 대신, 좌익 성향의 [[이슬람 학생연합]]에 가담하는 등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 외에도 [[이란 자유운동|자유운동]]과도 밀접한 인연을 맺었고, [[팔라비 왕조]]에 대항하는 길거리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되었다. 이 때 롤모델이 그 유명한 [[체 게바라]]였다고. [[이란 혁명|1979년 혁명]] 이후 [[모함마드 베헤슈티]] 등과 함께 [[이슬람공화당]]을 결성하는 등, 공화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이 무색하게, 1980년 대선에서 이슬람공화당에 비판적인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슬람공화당 후보는 3위로 낙선한다. 다만 총선에서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한 탓에 자당 소속의 [[모함마드알리 라자이]]가 총리로 임명될 수는 있었다. 물론 둘의 사이가 좋을 리가 전혀 없었고, 라자이는 무사비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지만, 바니사드르가 퇴짜를 내리면서 무산된다. 그 후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보수파들은 바니사드르를 탄핵하고, 라자이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무사비는 이제서야 외무장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1981년 8월 30일 라자이와 [[모함마드자바드 바호나르]] 총리가 [[이란 인민전사기구|인민전사기구]]의 폭탄 테러로 암살되자, 무사비는 알리 하메네이 신임 대통령 밑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같은 당 소속이었음에도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무사비는 당 내 좌파로 분류된 반면, 하메네이는 당 내 우파로 분류되었다.[* 물론 말이 "좌파"지, 이념적으로는 명백한 '''우파'''였다. 단지 상대적인 개념이었을 뿐.] 경제, 정치, 외교 등 각종 이슈에서 수시로 충돌이 잦았고, 이 끝에 1987년 이슬람부흥당은 결국 해산된다. 이 둘의 대립은 훗날 [[개혁파]]와 [[원칙파]]로 비로소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나마 [[루홀라 호메이니]] 최고지도자 생전에는 그냥 싸우는 정도였지만,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고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직을 승계하면서, 무사비의 입지는 더욱 더 위태로워진다. 하메네이는 최고지도자에 오르자마자 총리직을 '''폐지'''했는데, 뻔하겠지만 무사비 꼴 보기 싫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다만 '''일단은''' 살아남았는데, 이유는 대통령에 당선된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둘의 갈등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 여하튼 개혁파 진영에서는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올랐고, 1997년 3선 연임 금지에 걸려 불출마한 라프산자니를 대신해 개혁파의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 되었으나,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 때 인지도가 비교적 낮았던 [[모함마드 하타미]]가 대타로 출마했고, 투표 결과 압승하면서 일단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다. 2005년 하타미도 연임 제한에 걸리게 되자 무사비의 출마 설이 나돌았으나, 2004년 10월 12일 또 불출마를 선언한다. 그렇게 20년 간 정치권을 떠나 있던 2009년, 차기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일찍이 2005년 대선에서 하메네이의 신임을 받은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당선되면서 여러모로 본인의 입지가 위태로워진 상황이었고, 이를 극복하는 데 시급할 수밖에 없던 상황. 개혁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개표 결과 33.86%의 득표율로 아흐마디네자드에게 큰 표차로 패했다. 그 후 야권 지지세를 규합시켜 소위 "녹색 운동"을 이끌어 아흐마디네자드 정권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 역할을 했고, [[희망의 녹색 길]]을 결성했으나, 2011년 가택 연금 조치를 받으면서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이유는 당시 [[아랍의 봄]] 열풍이 불고 있었고, 아랍과 가까운 이란도 이 영향을 받았는데, 무사비가 아랍의 봄을 지지하는 시위를 주도한 게 원인이었던 것. 2013년 개혁파 [[하산 루하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가택 연금이 해제될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8년 임기 내내 불발되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더더욱이나 [[2021년 이란 대통령 선거|2021년 대선]]에서 보수파 [[에브라힘 라이시]]가 당선되었으니,[* 아예 대놓고 반체제 인사들을 대거 숙청한 장본인이었다.] 결국 연금 상태에서 여생을 마무리할 뜻. 비록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 했으나, 대통령 못지 않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며, 현재까지도 개혁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