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2011년]] [[8월 18일]], [[김성근]] 감독 경질 사태에 분노한 [[SK 와이번스]] 팬들[*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운동]] 문서에도 나오지만 노리타와 SK 팬덤이 어느 정도 분리된 건 2011시즌 끝날 무렵이나 되어서였다.]이 경기 직후 그라운드에 난입한 사건. 성숙한 관전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던 20세기에나 일어났을 법한 대규모의 관중 난동이 무려 2010년대에도 또 한 번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야구팬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꽤 큰 충격을 안긴 사태였다. 해당 사건은 [[노리타]] 등장의 가장 직접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당시 SK 팬덤은 대부분 이 사태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는데, 심지어 이 사태와 프런트 퇴진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SK 와이번스 갤러리|슼갤]]은 2014년까지도 김성근 친화의 대표적인 갤러리였다. 2014년 말 김성근이 한화로 간 뒤 강성 감독 팬이 모조리 빠져나간 뒤에야 물갈이가 되었으며, 지금은 김성근을 세이콘이란 멸칭으로 자연스럽게 부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 발단 == === 팬들과 프런트 간의 갈등 ===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의 마찰이 외부로 노출되고, 심지어 재계약이 어렵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당시 김성근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던 [[SK 와이번스]] 팬들은 프런트 측에 재계약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일련의 방법 중 하나가 바로 SK 와이번스 공식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인 '용틀임 마당'에 꾸준하게 재계약 요구 글을 릴레이 형식으로 계속 올린 것.[* [[2007년]]에도 같은 방식으로 [[이호준]]의 FA를 계약을 요구한 바 있으나 실패했다.] 게시판이 과도하게 과열되기 시작하자 프런트는 게시판인 '''용틀임 마당을 없애는 초강수'''를 두고 자유 게시판의 기능을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대체하며, 앞으로도 부활시킬 생각은 없다는 공지를 올린다. 이에 분개한 팬들은 장소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변경, 재계약과 용틀임 마당 부활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 === 이미 [[2007년]] 첫 계약 당시부터,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은 준비된 갈등이었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부터 프런트에서 그의 사단도 아니며 원하지도 않은 이만수를 수석 코치로 부임시켰고,[* 심지어 이만수는 삼성 시절부터 김성근과 썩 좋지 않은 관계였다.] 타 팀 감독의 계약기간이 3년인데 반해 2년 단기 계약을 맺었으며, 2007 시즌 초 홈구장 만원 사례에 마치 팀의 간판인 것처럼 대규모 팬티 퍼포먼스를 벌인 것을 볼 때, 프런트의 의도에 따른 2년 후 차기 감독이 이만수인 것은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었던 것. 하지만 예상 외로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2연속 우승을 하며 최고의 성과를 거뒀고, 그에 따라 2009년 3년 재계약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단 내 김성근 감독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이만수가 1군 수석코치에서 밀려나 2군 감독으로 이동하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해석 가능하다. 게다가 재계약 후 나온 당시 신영철 구단 사장의 [[막걸리 야구]] 발언, 김성근 감독의 [[이진영]] 등 FA 유출과 소극적인 영입 태도에 대한 구단에 불만을 나타냈던 것은, 당시까지는 그러려니 넘어갈 문제였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이것이 프런트와 감독간 파워 게임을 하는 이상기류였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심지어 김성근 감독은 프런트의 지원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양측의 의견에는 모두 일리가 있는데, 김성근은 외부 영입에 소극적이고 이진영 등 FA를 놓치는 과정에서 너무 적은 자금만 배정하는 SK 프런트의 행보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반면 프런트 입장에서는 계속된 우승-준우승 과정에서 선수 연봉이 너무 올라갔기 때문에 이를 부담스러워했고, 2군 선수 중 몇몇 선수를 1군에서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성장을 체크하겠다는 김성근 감독의 의견과 충돌하였다. 즉 김성근 감독 측에서는 왜 팀을 위해 지원을 안 해주느냐였고, 반대로 프런트 측에서는 이미 지원할 만큼 해주고 있다는 쪽이었다. 다만 1군 선수들의 연봉이 올라가고 있을 뿐 실제로 지원이 오는 건 아니었으니 김성근 감독 입장에서는 그렇게 인지하는 것이 당연했던 상황. 결국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불만이 더욱 쌓여갔다. 이에 프런트 측은 차기 감독감으로 키우던 [[이만수]] 당시 수석코치에게 보다 빠르게 감독 직을 넘기는 것도 고려했으나, 성적이 위낙 좋았고[* 우승 3회([[2007년 한국시리즈|2007]], [[2008년 한국시리즈|2008]], [[2010년 한국시리즈|2010]]), 준우승 1회([[2009년 한국시리즈|2009]]). 심지어 첫 부임인 2007년부터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계약기간이 2011년으로 끝나며 원래 감독 임기는 철저히 보장해 주는 원칙이 있었기에 두 번째 재계약 제의만 하지 않는 선에 머무른다.[* SK 프런트는 [[강병철]], [[조범현]], [[이만수]], [[김용희]], [[트레이 힐만]]까지 감독 모두 임기를 보장해주었다. SK에서 임기 못 채우고 잘린 감독은 아직까지 김성근 뿐이다. 다만 의외로 김성근 감독 또한 쌍방울 시절 이전까지는 모두 임기 후 재계약을 거부당한 것이지, 임기 중 경질당한 적은 없다.] 이 과정에서 프런트 직원의 말실수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양 측 모두 지속적인 언론 플레이를 벌였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애초에 2011년 초 SK는 "감독 최고 대우는 당연하다"며 김성근 감독 재계약을 천명한 상태였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19/2011081900777.html|#]] 하지만 정작 언론에는 그렇게 말해놓고 재계약 관련해서는 계속 지지부진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작 김 감독이 아닌 이만수의 거취 문제 등을 주로 이야기하며 같이 갈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이처럼 구단이 재계약에 적극적이지 않자, 김성근은 결국 시즌이 한창 중인 [[8월 17일]] SK 측과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자기가 먼저 공개 선언하는 초강수'''를 둔다. 요약하면 만료가 되는 이번 2011시즌까지 감독직을 수행한 후 물러나겠다는 것. 실제로 당시 김성근 감독은 다음날 감독으로 정상 출근하며 이번 시즌은 확실히 하고 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프런트는 이를 자신들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였으며, 전날 공개선언을 이유로 들어 그 다음날인 [[8월 18일]] 바로 '''김성근 감독을 전격 해임시키고, 이만수 2군 감독을 1군으로 끌어올려 감독대행으로 세우는 초강수로 맞대응한다.''' == 전개 == 재계약 결렬과 전격 해고라는 갑작스런 사태에 [[SK 와이번스]] 팬들은 다른 커뮤니티들과 연합하여 들고 일어났고, [[8월 18일]] 문학야구장 1루 측 외야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당시 운집한 300여 명의 팬은 대형 현수막 8개를 내걸고 SK 프런트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프런트는 이날 소요에 대비해 [[경찰기동대|전경]] 1개 중대를 요청, 배치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자, 시위 인원들은 외야에서 준비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 "[[민경삼]]이 물러가라!" > "[[신영철(기업인)|신영철]]도 물러가라!" > "프런트는 사퇴하라!"[* 당시의 모습은 4년 뒤 뉴스인 [[https://www.youtube.com/watch?v=u9Uwp3jDQTU|여기]]서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 ---- > 당시 시위 구호 해당 시위 진행 중 삼성 [[채태인]]의 결승 [[https://m.sports.naver.com/video/2825|투런포]]가 터졌고, 하필이면 그게 또 1루측 외야 성난 관중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자 이성을 잃은 관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작했다. [* 여담으로 이날은 상대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대체 외국인 선수 [[저스틴 저마노]]의 KBO 데뷔전이기도 했다. 하필 데뷔전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한게 놀라울 따름. 당시 SK 선발이었던 [[엄정욱]]도 이 피홈런이 옥의 티였을 뿐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6이닝 8K를 잡는 호투를 역시 선보였다.] 이외에도 경기 도중 관중 난입만 총 네 번이 있었는데, 1회초에 상의를 탈의한 남성이 난입한 후 붙잡혔고, 두 번째는 4회 도중 웃통을 벗은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했으며, 세 번째로 9회 [[송은범]] 유니폼을 입은 관중이 외야에서 뛰어내려 홈으로 전력질주하다 제지당했다.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 후 덕아웃으로 한 관중이 들어와 인터뷰를 하던 이만수 감독대행에게 욕설을 하다 끌려 나갔다. 물병 등 쓰레기가 그라운드에 떨어져서 수 차례 경기가 일시 중단되었으며, 아예 쓰레기통이 통째로 떨어지는가 하면, 그물에 매달리는 관중까지 등장했다. 이에 일부에선 [[인천 도원구장 연고팀의 사건사고|도원아재]]들이 문학에서 부활했다는 불명예스러운 비아냥까지 쏟아졌다.[* 실제로 그물망에 매달려 시위했던 관중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삼미 때부터 [[삼청태현]]을 응원하다 인천에 새로 창단한 SK로 갈아탄 올드팬으로 추측.] == 절정 == 결국 경기는 채태인의 홈런으로 결판이 나, 2-0으로 SK가 패배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중들은 순식간에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기든 지든 선수들은 경기 후 관중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이지만 이 날만큼은 분위기가 지나치게 험악하여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경기장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관중들을 진정, 해산시키기 위해 안전요원이 투입되지만 관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오물을 던지기 시작했고, 곧 문학구장은 거대한 야유와 쓰레기에 뒤덮였다. 9시 경 문학구장에 조명이 꺼지자, 마침내 1루 측 익사이팅존의 낮은 펜스를 통해 수 백에 달하는 SK 팬들이 난입하기 시작한다. [youtube(XMsOMXqBnOg)] [[파일:/image/poktannews/2011/08/18/201108182131773946_1.jpg]] 난입한 관중들은 유니폼을 불태우고, 이후 불펜 전기차를 타고 폭주하거나 경기장에 놓여있던 구단 집기나 냉장고 안의 음료수를 무단으로 훔치는 등[* 그 와중에 캐치볼이나 홈플레이트에서의 포수놀이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한 난동을 부리다가 20여 분 후 신고를 받고 경찰과 소방차가 출동하자 다시 펜스를 넘어 해산하였다. [[21세기]] 들어 그라운드에 불을 지른 행위는 처음이며,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이 난입한 경우도 [[1990년]]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 이후로 최대 규모였다. 구단 측의 발표에 따르면 소요사태로 인해 약 3500만원 가량의 피해를 입었다. 한편 덕아웃과 구단 전시물 등도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민경삼개XX''', '''신영철개XX''', '''프런트는 물러가라''', '''꺼져라 이만수''', '''유다''' 등등의 온갖 낙서의 향연이 펼쳐졌다.[[http://gall.dcinside.com/skwyverns/2021972|#]] [[http://gall.dcinside.com/skwyverns/2021983|##]] 그 외에도 모욕적인 일이 많았다. 한 팬은 [[김성근]] 감독의 등번호와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마운드에 묻었다. [[김성근]]이 경질되자 (감독으로서의) 그는 죽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동시에 "삼가 인천 야구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 결말 및 반응 == 해당 소요 사태는 그 다음날 저녁 주요 지상파인 [[한국방송공사|KBS]], [[MBC]], [[SBS]] 를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되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2343176|KBS 뉴스9]][* 여담으로 당시 앵커로서 이 사건을 보도한 [[민경욱]]은 당시 SK의 단장이었던 [[민경삼]]과 사촌 지간이다.] 당시 [[이만수]] 대행을 비롯한 선수단 또한 이 사건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973182|SBS 8뉴스]] [[https://imnews.imbc.com/replay/2011/nwdesk/article/2909993_30473.html|MBC 뉴스데스크]] 일부 언론은 이를 스포츠 팬의 양상 변화로 풀이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사건은 과거 스포츠 팬덤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사건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전까지의 한국 스포츠 팬덤은 경기의 승패에 주로 주목했던 반면, 이 시점부터는 프런트의 횡포 등 경기 외적인 요소까지 반응하기 시작한 것. 특히 온라인의 발달까지 결합하면서, 당시 팬덤의 움직임은 빠른 정보 전달로 더 넓은 범위의 주장을 포괄하게 되었고 조직의 규모도 훨씬 커졌다. 이는 SK 팬덤뿐만이 아니었는데, [[2011년 LG 트윈스 청문회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설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같은 시간, 3차 청문회를 진행 중이던 [[LG 트윈스 갤러리]] 이용자 중 일부는 이왕에 할 거면 우리도 저 정도로 저지르고 보자는 이야기까지도 나왔다. 당시 프런트의 횡포에 대해 반발하고 있던 팬덤이 많았던 만큼,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한 일부 인터넷 팬덤에서도 재밌다거나 속이 시원하다며 옹호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해당 사건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한동안 문학구장의 관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는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운동]]으로 이어졌다. [[분류:2011년/사건사고]][[분류:야구 사건 사고]][[분류:SK 와이번스-SSG 랜더스/사건사고]][[분류:폭동]][[분류:노리타(김성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