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광복군/군인]] [[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전신 학교]] [[분류:안악군 출신 인물]][[분류:실향민]] [[분류:문화재청장]] [[분류:건국훈장 애국장]] [[분류:1921년 출생]] [[분류:1996년 사망]] [[1921년]] [[6월 10일]]~[[1996년]] [[4월 21일]] [목차] [clearfix] == 개요 ==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제2대 [[문화재청장|문화재관리국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수여. == 생애 == 1921년 6월 10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40년 [[중국]]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노안(潞安)에서 김천성에게 포섭되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전신]에 가입하였다. 1941년 [[박영섭]], 박영진, [[선우기]] 등과 함께 중앙전시간부훈련단 내 한국 청년 간부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영국]]간의 협정에 따라 편성된 인면지구공작대에 부대장이 되어 한지성, [[박영진(독립운동가)|박영진]], 나동규, [[최봉진(독립운동가)|최봉진]] 등과 함께 [[임팔 전투]], 만다레 및 [[양곤]] 상륙작전 등에 참전하였다. 해방 후에는 [[안춘생]] 휘하에서 [[난징|남경]] 잠편지대 참모로 활동하다 귀국하였고, [[육군사관학교]] 5기에 임관해 [[육군대학]] 교수부원, [[제1보병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 [[1962년]] [[2월 17일]] [[문화재청]] 제2대 문화재관리국장에 임명되어 [[석굴암]]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1963년]] [[3월 12일]] 원대 복귀하였다. 그 후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전념하며 숙명여대 강사, 광복회 의전부장 등을 지냈고 1996년 4월 21일 별세하였다. == 여담 == * [[장창국]]이 1983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육사졸업생들에 의하면 뛰어난 영어실력과 독립운동가로서의 기백과 배짱을 갖춰 동기생들 사이에서 형님 대접을 받았다한다. 육군대학 교수부원 등 학술 분야에서 복무하고 후일 문화재관리국장을 역임한 것으로 볼때 학문적 소양이 높게 평가된 것으로 보인다. * 인면전구공작대 활동 당시 일본군 정세 판단에 뛰어난 공적을 보여 영국군 사단장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인면전구공작대 출신 중 박영진은 6.25 전쟁 발발 초기 전사하였고 최봉진은 예편 후 고향인 광주로 낙향했으며 한지성은 [[조선인민군]]에 복무해 서울 점령 당시 서울시 인민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여러 이유로 인면전구공작대의 활동이 많이 조명되지 않아 그 들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참고자료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8370|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제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