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문경섭}}}'''[br]'''文瓊燮'''}}}}}}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문경섭.jpg|width=100%]]}}} || || '''자''' ||경옥(敬玉), 경욱 || || '''호''' ||몽호(夢湖) || || '''본관''' ||[[남평 문씨]][* 순질공파-경숙공-면수재-신창파 29세 섭(燮) 항렬.] || ||<|2> '''출생''' ||[[1883년]] [[10월 7일]][*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7월 7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 ||[[충청도]] [[부여군|임천군]] 내동면 북구천리[br](現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 [[독립유공자]] [[문장섭]]도 이 마을 출신이다.] 139번지) || ||<|2> '''사망''' ||[[1941년]] [[9월 18일]][* [[음력]] [[7월 27일]].] || ||[[충청남도]] [[부여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54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3년 10월 7일 충청도 임천군 내동면 북구천리(現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 139번지)에서 아버지 문상국(文相國, ? ~ ?. 3. 15)과 어머니 [[밀양 박씨]](? ~ ?. 2. 17)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전라북도]] [[익산시|익산군]] 익산면 이리 289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24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596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이주했다]]. 일찍이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왕청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에 가입했고, 1920년 4월 총재 [[서일]]의 명령에 따라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국내에 잠입했다. 이후 [[서일]]의 비서역으로 있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0|강철구]](姜鐵求)·[[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99|김동진]](金東鎭) 등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18촌 지간의 족제(族弟) [[문장섭]]을 비롯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608|박길화]](朴吉和)·[[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96|김동순]](金東純)·[[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83|김정제]](金廷濟)·김도균(金道均)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서무부장 김택(金澤)에 전달했다. 1922년 10월 모든 독립공채를 처분할 수 있게 되자 강철구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 본부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24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596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1년 9월 18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별세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에 안장되었다가 2014년 11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남평 문씨]][[분류:부여군 출신 인물]][[분류:1883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