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도립공원)] ||<-4> '''{{{#000,#fff [[경상북도|{{{#000,#fff 경상북도}}}]]의 [[도립공원|{{{#000,#fff 도립공원}}}]]}}}''' || ||<-4> {{{#000,#fff '''{{{+1 문경새재}}}'''[br]聞慶새재 (조령)[br]{{{-1 Mungyeong Saejae}}}}}}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문경새재 도립공원, 너비=100%, 높이=100%)]}}} || ||<-2> {{{#fff '''위치'''}}} ||<-2> '''[[경상북도]] [[문경시]] [br] [[충청북도]] [[괴산군]] ''' || ||<-2> {{{#fff '''높이'''}}} ||<-2> '''642m ''' || ||<-2> {{{#fff '''좌표'''}}} ||<-2> '''북위 36° 46′ 1.46″'''[br]'''동경 128° 4′ 27.29″''' || ||<-2> {{{#fff '''면적'''}}} ||<-2> '''5.3㎢''' || ||<-4> {{{#fff '''위성사진'''}}} || ||<-4>{{{#!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문경새재도립공원.png|width=100%]]}}}|| ||<-4> {{{#fff '''문경새재 도립공원'''}}} || ||<-2> {{{#fff '''지정일'''}}} ||<-2> '''1981년 6월 4일 ''' || ||<-2> {{{#fff '''관리주체'''}}} ||<-2> [[경상북도|{{{#000,#ddd 경상북도}}}]] || ||<-2> {{{#fff '''홈페이지'''}}} ||<-2> [[https://www.gbmg.go.kr/tour/contents.do?mId=0101010100|[[파일:경상북도 휘장.svg|width=15]]]]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our.gbmg.go.kr/?1391.jpg|width=100%]]}}}|| || {{{#fff '''문경새재의 제1관문인 주흘관'''}}} || [목차] [clearfix] == 개요 == '''새재''' 또는 '''조령'''(鳥嶺)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사이를 잇는 해발 642m의 [[고개]]로, [[소백산맥]]의 조령산(1,017m)을 돌아 간다. 새재는 조령을 순우리말로 읽은 것으로,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전통적으로 충청도와 경상도의 도계였으며, 오늘날에도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 중 하나를 이룬다. [[경상북도]]에서는 조령 일대를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이 밖에 [[대한민국의 명승|명승]] 제32호와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대한민국의 사적/101~200호|제147호]](새재에 설치된 관문들('문경 조령 관문'))로도 지정되어 있다. == 설명 == 문경새재의 험준함은 예로부터 유명해서, [[삼국시대]] 때는 [[신라]] 초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이곳에서 결진하여 매복했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더 효과적으로 막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파견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보고 '''"이 험준한 고개를 지킬 생각을 못 하다니 신 총병도 참 지략없는 사람이다."'''하고 신립을 비웃었다고 한다. 그가 조령에서 적을 막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충주 탄금대 전투|탄금대 전투]] 문서의 [[충주 탄금대 전투#s-6|6번 문단]]으로.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20104.22007202503i1.jpg]]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추풍령]](좌로), [[죽령]](우로)과 함께 [[낙동강]] 유역([[경상도]])과 [[한강]] 유역([[경기도]])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전근대 시절에는 죽령은 자체가 험한데다 단양의 [[남한강]] 협곡때문에 한산했고, 추풍령은 우회길인데다 옥천과 영동사이에 있는 [[금강]]의 협곡들 때문에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조령은 고개가 험한 것을 빼면 한성과 경상도를 직선거리에 가깝게 이었고 협곡과 같은 방해물이 적었다. 그 덕분에 청주에서 회인과 보은을 거쳐 상주로 가는 고개인 화령과 함께 주요 고개로 자주 이용이 되었다. 특히 [[과거 제도|과거]]를 보러 가는 경상도의 [[선비]]들이 [[화령]]과 함께 그야말로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죽령으로 향하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는 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 [[후삼국시대]] [[견훤]]과 [[태조(고려)|왕건]]의 격돌이 있었던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며(929년 가은성 공방)[* 흥미롭게도 [[상주시|상주]] 출신이란 견훤은 정확히는 문경새재 출신이 된다. 물론 상주나 문경이나 거기가 거기.] 지금도 복원이 잘 되어있어 꽤 준수한 트레킹 코스로 3개 [[관문]](주흘, 조곡, 조령관)이 있다. == 교통 == 오늘날 [[충주시|충주]] - [[문경시|문경]]간의 교통은 [[이화령]]을 지난다. [[서울특별시|서울]] - [[부산광역시|부산]]의 지름길인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IC|문경새재 나들목]]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3번 국도]]와 [[34번 국도]]가 지나가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화령]]을 넘어간다. 그런데 [[중부내륙선]] [[철도]]는 '''이화령이 아니라 조령산을 직접 돌파한다'''. 처음에는 이화령으로 계획됐으나 지질 조사 결과 '''문경새재를 직접 돌파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그래서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 교각을 세우고 있다. 이곳에 [[연풍역]]이 들어설 예정이다. 문경새재의 인지도가 워낙에 높은지라 이화령을 지나는 도로에도 문경새재 이름을 붙이고 있다. 과거에는 매우 붐볐으나 이제는 한산한 [[자전거 도로]]이자 트레커들의 코스가 된 [[3번 국도]](신작로)의 [[이화령]] 고갯길이 새재 자전거길로 불리며, [[중부내륙고속도로]]의 터널도 이화령을 지나는데 문경새재터널로 이름지어졌고, 근처에 있는 나들목의 이름 역시 [[문경새재IC|문경새재 나들목]]이다. 3관문에서 수안보와 충주로 가는 버스는 배차간격이 길고, 막차가 17:10에 있는데 실제로는 5분 일찍 도착하여 출발하므로 막차 시간에 주의를 요구한다. 그 외 소조령(확장되기 전 2차선 3번 국도)까지 나가면 '신혜원'이라는 정류장이 있는데 여기서 [[괴산군]]에서 수안보를 오가는 [[농어촌버스|군내버스]]를 탈 수 있다. == 매체 == *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태조 왕건]]에서 [[궁예(태조 왕건)|궁예]]로 열연한 [[김영철(배우)|김영철]]이 이곳을 찾는 에피소드가 나왔다. 후술하듯이 태조 왕건을 촬영한 세트장이 근처에 있다. * 문경고개: 1950년에 작곡된 북한 노래의 배경이다. * [[전국노래자랑]]: 2005년 문경시 편을 문경새재 제1관문 근처에서 녹화했었다. * 진도 [[아리랑]]: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라는 가사가 있으며, 2000년대 중3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 기타 == * 새재 3관문인 조령관의 경우 새재 안은 [[경상북도]] [[문경시]] 관할이지만 그 밖으로는 '''[[충청북도]] [[괴산군]] 관할'''이기 때문에 행정구역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 있다. 조령관 새재 안에 구급상황이 발생하면 경북지방 소방에서 구조 및 지원을 하지만 그 밖의 괴산군 지역은 '''충북지방 소방에서 구조 및 지원'''을 하게 되기 때문에 조령관 관외지역에서 사고 등이 발생하여 구조를 요청할 경우 소방 출동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치안상으로도 조령관문 안은 경북경찰이 조사를 나오게 되지만 그 밖의 괴산군 지역은 '''충북경찰'''이 조사를 나올 수 있다. * 새재길을 걷다 보면 [[소나무]]들이 파여 있거나 흠이 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부족한 연료를 보충하려고 송진을 추출했던 흔적이다. * 문경에서 양평 방향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문경새재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는 구간이 있는데, 주변의 높은 산세 가운데에 푹 꺼진 고개 양 옆으로 바위산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군사 쪽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정말 입구 틀어막고 방어하면 되겠구나 싶은 천혜의 요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 [[듀스(음악그룹)|듀스]] 출신의 가수 [[김성재]]의 화장된 유해가 이곳에 뿌려졌다. 생전에 꼭 가 보고 싶어했던 곳이 문경새재였다고 한다. * 제1관문인 주흘관 인근에는 드라마 [[태조 왕건]]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촬영한 [[https://www.gbmg.go.kr/tour/contents.do?mId=0101040100|사극 세트장]]이 있다. [[태조 왕건]] 이후에도 고려시대를 다루다가 2008년 이후부터는 [[여말선초]]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KBS 사극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다. == 조령산불됴심표석[anchor(됴심)]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aejae_dyosimbi.jpg]]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지정 문화재 카테고리로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가 아니나 가치가 있다 판단시, 지자체장이 선정한다.] 제226호. 옛날에 세워진 [[산불]] 조심 표석이 이곳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산불'''됴'''심'이라고 쓰고 '산불'''조'''심'이라고 읽는다.]] 이 표석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구개음화]]가 활발해진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를 의도한 표기가 '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구개음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시기에 이 비석이 세워졌음에 대한 방증. 즉 발음은 [조]로 하면서도 쓸 때에는 "원래 '됴'로 써야 맞는 것이겠거니" 하며 지레짐작을 해 버린 경우이니, 일종의 [[과도교정]]에 해당한다. 사실 '조심'의 '조(操)'의 [[중고한어]] 및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t͡sʰ'''ɑu]로, 초성이 [[치경음#s-1.1.3|무성 치경 파찰음]]이기 때문에 'ㄷ'이 올 이유도 접근음 [j]가 올 이유도 없다. 아마 조선 초기에는 '조'가 [t͡so]라고 발음됐던 것이 나중에 [t͡ɕo]라고 읽히게 되었는데[* 반절이 七刀切이므로 '''ㅊ'''ㅣㄹ+ㄷ'''ㅗ'''='''초'''에 가깝다.], 이를 '됴'라고 인식해서일 것이다. 즉 [t͡so]와 [tjo]가 모두 [t͡ɕo]로 뭉개진(…) 상황에서 [t͡ɕo]라는 발음에만 기대어 원음이 [tjo]였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여 새긴 것. 또한 [[山]]의 순우리말인 '뫼' 혹은 '메'가 잘 쓰이지 않는 시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옛한글로 쓰인 비석이 총 5기가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순한글로 쓰인 유일한 비석인데다 자연보호에 관한 당시의 시선도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표기가 독특한 느낌으로 보여서인지 이곳 주변에서는 [[https://www.nocutnews.co.kr/news/260613|팻말]] 등을 설치할 때도 비석처럼 쓰는 것이 [[불문율]]이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조령_산불됴심_표석|한국어 위키백과: 조령 산불됴심 표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645&cid=40942&categoryId=37713|두산백과: 조령 산불됴심표석]]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260000,37&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조령산불됴심표석 (鳥嶺산불됴심標石)]] >산불조심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비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 >서쪽면에 ‘산불됴심’이라는 순 한글 글자를 세로로 큼지막하게 새겨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국경 수호와 산성 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고 산불을 조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이를 서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 >순수 한글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이 표석은 ‘조심’을 ‘됴심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영·정조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 관련 영상 == [youtube(pOkd6tq4tsY)] [[분류:조선/건축]][[분류:고개]][[분류:관문]][[분류:대한민국의 명승]][[분류:대한민국의 도립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