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유송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13E88 0%, #3F51BA 20%, #3F51BA 80%, #313E88)" {{{#ece5b6 '''고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사마진 군공)] ---- ||<-5><:><#800080> '''[[송(육조)#s-7|{{{#ffffff 동진의 송왕}}}]]''' || ||<:> 신규 책봉 ||<:> {{{+1 ←}}} ||<:> '''유유''' ||<:> {{{+1 →}}} ||<:> 유송 건국 ||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13E88 0%, #3F51BA 20%, #3F51BA 80%, #313E88); color: #ece5b6" '''유송 초대 황제, 고조 무황제[br]{{{+1 유송 무제}}}[br]宋武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송무제 유유.jpg|width=100%]]}}} || ||<|2> '''출생''' ||[[363년]] [[4월 16일]] || ||[[동진]] [[장쑤성|진양군]] [[전장시|단도현]] 경구리[br](現 [[장쑤성]] [[전장시]] 단투구) || ||<|2> '''즉위''' ||[[420년]] [[7월 10일]] || ||[[동진]]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 남교[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사망''' ||[[422년]] [[6월 26일]] (향년 59세) || ||[[송(남조)|유송]]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 황궁 서전[br](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초녕릉]](初寧陵) || ||<|4> '''재위기간''' ||'''{{{#ece5b6 동진의 송왕(宋王)}}}''' || ||[[418년]] [[12월]] ~ [[420년]] [[7월 10일]] || ||'''{{{#ece5b6 초대 황제}}}''' || ||[[420년]] [[7월 10일]] ~ [[422년]] [[6월 26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유(성씨)|팽성 유씨]] || || '''휘''' ||유(裕) || || '''부모''' ||부황 [[유교(유송)|효목제]][br]모후 [[조안종|효목황후]] || ||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 || '''배우자''' ||무경황후, [[문장황태후|문장태후]] || || '''자녀''' ||7남 9녀 || || '''신장''' ||175cm || || '''아명''' ||기노(寄奴) || || '''자''' ||덕여(德輿) || || '''작호''' ||송왕(宋王) || || '''묘호''' ||'''[[고조]](高祖)''' || || '''시호''' ||무황제(武皇帝) || || '''연호''' ||[[영초]](永初, [[420년]] ~ [[422년]])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유송무제.png|width=100%]]}}} || || '''{{{#ece5b6 역대고인상찬에 실린 초상화 }}}'''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東晉)의 무장이자, [[위진남북조시대]] [[송(육조)|유송]](劉宋)의 건국자.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휘는 유유(劉裕). 자는 덕여(德輿). [[연호]]는 [[영초]](永初)로 재위한 2년간 쓰고, 송[[소제(유송)|소제]]가 7개월을 더 썼으며 다음해 정월에 개원했다. 특이하게도 유유의 생몰 기간이 59년으로 그가 건국한 유송의 존속 기간인 59년과 일치한다. == [[무제(유송)/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무제(유송)/생애)] == 평가 == >'''"[[모용수]]는 아버지와 형([[모용황]]과 모용각)의 명성을 등에 업고 [[중흥|과거의 공업을 회복했으나]] 유유는 [[입지전적|미천한 가문에서 일어나 홀로 대업을 이루었으니]] 유유가 더 뛰어납니다."''' > - '''[[최호(북위)|최호]](崔浩, 북위의 대신)''', [[북위]]의 [[탁발사]]가 유유와 모용수의 능력을 논하자 대신 최호가 내린 평가[* 전에 유유에게 패한 것도 있어 탁발사는 유유 생전에 유송의 땅 1평도 건드리지 않았다.] >'''"유유의 공적은 [[조조]]를 넘어서나 용인에서는 [[조조]]만 못하다."''' >'''"조적, 유익, [[환온]], [[사안]]의 백 년 경영도 유유의 공적에 미치지 못한다."''' > - '''왕부지(王夫之, [[명나라]] 말기의 학자)''' '''근 370년에 이르는 [[위진남북조시대]] 역사상 한족 출신으로 가장 큰 군공을 세운 희대의 명장'''으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한족 출신 가운데 군사적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인물들은 [[조조]], [[환온]], 유유, [[진경지]] 정도가 있다. 유유는 이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었다고 평가된다. 유유는 [[산둥성|산동]]과 하남, 촉, 그리고 일시적이지만 관중 일대까지 수복했다. 즉, [[낙양]]과 [[시안시|장안]], 두 옛 수도와 [[청주(중국)|청주]] 일대까지 점령한 것이다. [[동진]]의 [[환온]]과 [[소량]]의 [[진경지]]는 [[낙양]]까지 수복했고, 장안까지는 장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남조 역사상 유일하게 [[산둥 반도|산동]]을 완전히 점령했다.''' 후대의 평에 따르면 그는 통솔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어 앞을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으며, 용감하고 과단성, 군사적 재능, 정치적인 감각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검소하여 옷차림이 소박했고, 유희와 연회를 거의 열지 않았으며 궁녀들을 대부분 내보내 수가 적고 축재도 하지 않았다. 또 영주에서 [[호박]]으로 만든 [[베개]]를 진상했는데 광택과 색깔이 아름다워 황금 100냥을 호가했다. 그러나 유유는 이걸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장병들의 부상을 치료하는데 쓰게 했다. 유유는 원래 몸에 열이 많았고, 예전에 손은 토벌전에서 칼에 맞은 상처가 있어 노년이 된후 늘 몸을 차게 하는 약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누군가 석상을 진상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부수게 했다. 광주에서 진상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베]]는 되돌려주게 하고 그 담당 관원에게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유유는 자기가 경구와 단양에서 농사짓던 시절에 사용하던 쟁기같은 농기구와 등불 등을 보존하여 황궁에 작은 박물관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창업의 어려움을 일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유지가 자손들에게 잘 전해지도록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일찍, 무언가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기도 전에 숨진 탓에 그의 안배는 유송의 앞날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유유 본인은 일생을 아주 바쁘게 살고 열심히 살았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손문]], 황흥과 [[신해혁명]] 3존 중 하나였던 장병린은 [[악비]]와 함께 그를 가장 숭배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둘 다 남방의 병사를 이끌고 북방의 이적([[오랑캐]])을 격파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식농사는 한 마디로 완전히 실패했다. 본인이 아무리 위대해도 자식 농사의 실패가 어렵게 이룩한 창업을 하루 아침에 망친 것이다. 어찌보면 세습제의 한계를 그 누구보다 여실히 보여준 인물. 사실 이런 평가는 그의 아들 송문제 [[문제(유송)|유의륭]]에게 더 적합한 얘기일 수도 있다. (유유는 적어도 유의륭이라는 좋은 왕재를 가진 아들을 두기라도 했지 유의륭의 아들복은 아버지보다 더 없었으니까.)[* 물론 유의륭도 유탄(유의륭의 6남)이나 유휴인(유의륭의 12남)과 같은 나름 괜찮은 자식들도 있었고(실제로 유의륭은 유탄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다.) 비교적 정상인들도 있었으나 이들은 유창(유의륭의 9남)을 제외하곤 유의륭 사후 [[효무제(유송)|효무제]]와 [[명제(유송)|명제]]가 다 죽여버리면서 제 명에 못살았다.] 어쨌거나 [[송(남조)|유송]] 왕조의 명운을 따져봤을 때 그 왕조에서 제대로 된 군주가 이들 부자들 뿐이라는 점에선 참 지지리도 운 없는 부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이후에는 전란의 극치인 [[위진남북조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개념이 있는 마지막 황제인 [[순제(유송)|순제]]를 제외하고 '''[[전폐제(유송)|노답 근친상간 미친놈]]부터 [[후폐제(유송)|살인이 목적 그 자체인 사이코패스 살인마]]까지 출몰하는 등 집안이 무슨 저주를 받았나 싶을 정도의 막장들이 출몰했다.''' 그렇지만 유유의 공적은 확실히 유효했다. 유유는 북벌을 통해 [[남조]]가 [[북조]]와 맞설 힘을 갖추게 하였고[* 당시 중국 인구 대부분이 하남과 하북일대에 살고 있었다. 학계는 위진 남북조 시기강북의 인구를 2000~3000만으로 잡는데 강남 인구는 500~100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유의 북벌을 계기로 남조는 일시적이나마 북조를 넘어선 국력을 갖출수 있게 됐다.], 지방군벌들을 정리하여 남조 내부를 안정시켰다. 비록 송 말기와 [[제나라]]가 들어서며 가끔씩 내전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동진]] 말기처럼 혼란스러운 때는 양 말기밖에 없었는데, 이는 유유가 [[동진]]을 평정하고(417년) 133년이 지나서야 등장했다. 유유가 동진의 군벌을 정리한 덕분에 유의륭이나 [[무제(양)|소연]] 같은 [[명군]]들이 남조를 부강시킬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무엇보다 유유의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다. [[동진]]의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북벌을 통해 남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적 성과를 얻었다. [[유의진]]이나 [[서규지]] 같은 휘하 지휘관의 패전을 제외하면 유유군은 늘 승리했다. 유유는 적의 의도를 간파했고, 이에 알맞는 전략을 구사하여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유유가 장안을 유의진에게 맡긴 것만을 제외하면 전략적인 실수도 없었다. [[북위]]군을 각월진으로 격파한 것이나 손은군과의 회전을 보면 임기응변이나 전술적 능력이 매우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진]]의 [[혜제(서진)|혜제]] 사마충보다 더 지적장애자였던 [[안제(동진)|안제 사마덕종]]을 죽인 것 때문에 후세에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유유 입장에서도 살려주는 것이 더 이득임에도 부득이하게 죽일 수밖에 없던 것이 '''자기가 살아있는지조차도 몰랐던 자에게 덥석 황위를 받으면 누가 봐도 찬탈이라는 티가 확 나니까 말이다'''. 아무리 선양이 정치적 쇼라고 해도 최소한의 틀은 갖춰야 효과를 발휘하는데 황제라는 작자가 이 모양이면 어쩔 수가 없었다. [[기호지세|권력을 쥔 이상 놓치면 잘해봐야 개털이 되어 실각이나 하면 천행이고 못하면 본인은 물론 가족, 친척들까지 멸족이라 어쩔수없이 제위를 지켜야 하기 때문.]] 그리고 사마덕문을 세운 후 폐위하고 그 일족을 죽인 번거로운 절차를 거친 것도 형이 후사없이 죽으면 친동생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지켜졌던 원칙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권력자라도 이건 어쩔 수 없었고, 일족을 죽인 것도 기반이 약했던 유유 일가의 특성상 살려두었다간 큰 위협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였다. 또한 남조의 문벌귀족이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남조는 황제와 귀족들의 대립이 극심했는데, 남조 최고 귀족가문인 왕(王)씨, 사(謝)씨, 원(袁)씨, 소(蕭)씨는 황제만 아닐뿐 사회적으로는 황제 이상의 권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유유는 실질적인 업무를 7품 이하의 관료들이 맡도록 하였고[* 남조의 귀족층들은 [[구품관인법]]을 통해 7품이 아닌 6품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렇게 안하는 귀족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후의 황제들도 귀족들의 특권은 인정해줄지언정 유유의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며 문벌귀족들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었다. 남조에서 수십년 주기로 벌어진 내전과 지배층 교체는 이를 더욱 가속시켰다.] 그리고 133년쯤 지나 양무제 말기 후경의 대란이 일어났을 때, 난을 진압해야할 고위관료들은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이 난리통을 어떻게든 [[진패선]]이 진압하고, 남조의 마지막 정권인 진을 세웠지만 이때의 피해를 남조는 다시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수나라]]의 주도로 천하통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정작 그 수나라는 [[문제(수)|수문제]]의 아주 훌륭한 치세를, 다음 황제인 [[양제(수)|수양제]]가 대차게 말아먹은 덕분에 수양제의 이종사촌 형제인 [[고조(당)|이연]]에게 찬탈당하고, [[당나라]]에 와서야 [[위진남북조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송서)]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남사)]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유유,version=78)] [[분류:무제(유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