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주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B190F 0%, #3B190F 20%, #3B190F 80%, #3B190F); color: #ece5b6" '''북주 제3대 황제[br]{{{+1 고조 무황제 | 高祖 武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북주무제어진.jpg|width=100%]]}}} || ||<-2> {{{#ece5b6 {{{-2 우문옹 어진 (역대제왕도권)}}} }}} || ||<|2> '''출생''' ||[[543년]] || ||[[서위]] [[산시성(섬서성)|무향군]] [[웨이난시|무향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웨이난시]] 다리현) || ||<|2> '''즉위''' ||[[560년]] [[5월 31일]] || ||[[북주]] [[시안시|장안]][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578년]] [[6월 21일]] (향년 35세) || ||[[북주]] [[시안시|장안]][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효릉]](孝陵) || ||<|2> '''재위기간''' ||'''{{{#ece5b6 제3대 황제}}}''' || ||[[560년]] [[5월 31일]] ~ [[578년]] [[6월 2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우문부|우문(宇文)]] || || '''휘''' ||옹(邕) || || '''부모''' ||부황 [[우문태|태조]][br]모후 문선황후 || || '''형제자매''' ||13남 13녀 중 4남 || || '''배우자''' ||무성황후, 태제태후 || || '''자녀''' ||7남 3녀 || || '''아명''' ||예라돌(禰羅突) || || '''작호''' ||보성군공(輔城郡公) → 노국공(魯國公) || || '''묘호''' ||'''[[고조]](高祖)''' || || '''시호''' ||무황제(武皇帝) || || '''연호''' ||보정(保定, [[561년]] ~ [[565년]]) [br] 천화(天和, [[566년]] ~ [[572년]]) [br] [[건덕]](建德, [[572년]] ~ [[577년]]) [br] 선정(宣政, [[578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북주]](北周)의 제3대 황제. '''북주 왕조 최고의 [[명군]]이며, [[문제(수)|수문제 양견]]이 이룩한 천하통일의 기틀을 닦은 군주이다.''' 형인 효민제 [[우문각]]과 명제 우문육을 차례대로 살해한 권신 우문호(宇文護)에 의해 황제로 등극했지만, 12년간의 기다림 끝에 결국 사촌형 우문호를 제거하고('''천화정변''') 황권을 회복했으며, 국력을 크게 발전시켜 북주보다 우위에 있었던 [[북제]]를 멸했으나, [[진(육조)|진나라]]를 칠 준비를 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생애 == === 즉위 이전 === 543년, [[서위]]의 실권자였던 [[우문태]]와 첩 질노씨(叱奴氏)와의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효심이 깊고 겸손했다고 한다. 특히 이복형이자 서장남이었던 [[명제(북주)|우문육]]과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그는 서출이었지만 집안에서의 대접이 좋았다. 544년, 부성공에 봉해졌고, 557년 우문육이 즉위한 뒤에는 주국(柱國), 노공(魯公)으로 책봉되었다. 세종 명제 우문육은 그에게 자주 나랏일 전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우문옹은 말을 삼갔으며, 그래서 우문육은 우문옹에게 >'''''그는 말수가 적지만, 하는 말은 다 옳다.''''' 라는 평가를 내렸다. 560년 권신 우문호가 사촌동생인 명제 우문육의 유능함을 경계해 음식에 독을 탔고, 그것을 먹은 후 병이 든 우문육은 자신의 아들들이 모두 어렸기 때문에 동생인 우문옹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붕어했다. 결국 우문호는 우문옹을 북주의 제3대 황제로 옹립했다. === 재위 초기 === 우문옹이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여전히 우문호가 장악하고 있었다. 우문옹은 두 형이 유능함을 보여주다가 제거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위 초반기에는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560년, [[양(남조)|양나라]]의 장군 왕림과 그가 황제로 세운 [[영가왕|소장]]이 [[진(남조)|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소장은 [[북제]]로 도망쳤으며, 그의 영토는 북주와 진나라가 각각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국간 긴장이 높아지자, 겨울에 북주의 장수 하약돈(賀若敦)과 독고성(獨孤盛)이 진나라 장수 후전(侯瑱)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초반에는 북주가 우세했지만, 날이 갈수록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61년, 결국 북주군이 고립상태에 빠지자 진나라가 평화협상을 제의했고, 562년 북주는 오늘날의 호남성(湖南省) 일대 영토를 진나라에게 돌려주는 대신, 포로로 잡혀 있었던 진나라 황족 [[선제(남진)|진욱]]과 그의 아들 [[진숙보]]를 돌려보내 주었다.[* 진욱은 훗날 진나라의 폐제 [[진백종]]을 몰아내고 제4대 고종 선제가 되었다.] 그런데 진욱과 진숙보 부자를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우문호는 분노하여 제멋대로 하약돈을 파직시켰다. 564년, 숙적인 [[북제]]와 적대 관계였던 북주는 [[돌궐]](쾩튀르크)과 동맹을 맺고 북제를 침공했다. 북주군은 북제 제2의 수도인 진양(晉陽)으로 쳐들어갔지만, 북제의 명장이었던 단소(段韶)와 [[곡률광]]에게 막혀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우문호는 북제에 평화 사절을 보내 북제에 억류되어 있었던 어머니 원씨와 그의 고모(삼촌 우문태의 여동생)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북제의 무성제 [[고담(북제)|고담]]이 이를 승낙했다. 어머니가 돌아오자, 우문호는 매우 기뻐했고, 전국적으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돌궐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565년, 무제가 우문순(宇文純)을 사신으로 돌궐로 보냈을 때 돌궐의 목간가한(木杆可汗)은 이들을 포박해 사로잡았다. 567년, 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상주(湘州)자사 화교(華皎)가 북주 및 [[후량(남북조시대)|후량]][* 양나라 황족 [[소찰]]이 [[우문태]]의 도움을 받아서 세운 강릉 일대의 괴뢰 정권이었다.]에 도움을 요청했다. 무제는 동생 우문직(宇文直)을 파견했지만, 진나라의 명장 오명철이 이를 격파하고, 북주와 후량의 일부 영토를 점령했다. 진나라는 한때 후량의 수도 [[형주#s-3|강릉]]을 점령할 뻔했지만,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두고 우문호는 굉장히 화를 내며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우문직을 파직했다. 이때부터 우문호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무제 우문옹은 신중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568년, 무제는 돌궐과 진나라, 양쪽에 적이 있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다고 보고, 다시 돌궐과 화친해 목간가한의 딸을 황후로 삼았으나 [[정략결혼]]이라 우문옹은 그녀를 쌀쌀맞게 대했다. 돌궐도 이 정략결혼에 응답해 포로로 잡혀 있었던 우문순을 돌려보냈다. 이처럼 무제 우문옹은 재위 초반기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국가를 안정시켰지만 어디까지나 권신 우문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였고, 겉보기에는 어리석게 행동했기 때문에 우문호는 여전히 그를 만만히 여겼다.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하지만 무제 우문옹은 사촌형인 우문호가 국정을 마음대로 전횡하며 불만이 계속 쌓이고 있어서 반대파들이 늘어나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 권신 우문호 제거(천화정변) === 572년, 무제 우문옹이 황제로 즉위한 지 13년째 되는 해이고 우문호가 권력을 잡은 지는 16년째 되는 해였다. 하루는 우문호가 신하 유계재(庾季才)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문호: 천도(天道)가 과연 어찌될 것 같소? ''' >''' 유계재: 곧 변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께서는 마땅히 권력을 천자에게 되돌려 주십시오. 그리고 청컨대 칭병하여 집에 머무르십시오. 그리하면 옛날 주공(周公) 단과 소공(召公) 석의 명성에 견줄 수 있고 자손들은 번성할 것입니다.'''[* 주공 희단과 소공 희석은 서주 초기의 인물로 주무왕이 붕어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주성왕이 즉위하자 그가 성장할 때까지 보좌한 숙부들이었다. 주성왕이 어렸기에 자신들이 대신 권력을 잡았고, 그랬기에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으나 끝까지 초심을 지켜 어린 조카를 잘 보필하고 물러나서 유교에서 칭송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은 노나라, 소나라, 연나라의 군주를 배출하며 수백년간 잘먹고 잘살았다. 당장에 앞서 말한 노나라와 연나라는 우리가 아는 공자의 고향 노나라와 전국칠웅의 연나라를 말한다.~~헌데 우문호는 이미 조카를 2명이나 죽여서 여기에 빗댄다는게 넌센스이다.~~] 그러나 우문호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우문옹의 동생 우문직을 파직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우문직이 우문호에게 불만이 쌓이자, 무제 우문옹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우문직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였다. 우문직이 우문호를 제거해야 한다고 강하게 간언을 올리자, 우문옹도 우문직에게 12년간 숨기고 살았던 생각, 즉 '우문호 제거' 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 둘은 곧 자신들의 편으로 우문신거(宇文神舉), 우문효백(宇文孝伯), 왕궤(王軌) 등을 포섭한 뒤, 작전을 꾸미기 시작했다. 572년 3월, 마침내 무제 우문옹은 우문호가 입궐하자 황태후 질노씨(叱奴氏)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하면서, 우문호에게 황태후를 간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술을 경계하는 내용의 《주고》(酒誥)라는 책을 주면서 읽어 드리라고 했다. 우문호가 태후를 알현하러 들어가 《주고》를 읽는데 갑자기 우문옹이 '''[[뒤통수|뒤에서 옥으로 된 홀(笏)로 우문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우문호가 쓰러지자 우문직이 와서 그의 목을 베었다. 우문호는 이렇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천화정변''') 우문호는 평소에 궁궐의 어림군보다 더 많은 사병을 거느렸고, 부하들은 그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전횡을 부렸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권신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를 제거하는 데는 무제 우문옹의 [[처세술]]이 굉장히 중요했다. 초대 황제인 효민제 우문각과 제2대 황제인 명제 우문육이 모두 우문호에 의해 제거되었기에 무제 우문옹은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우문호를 재상과 도독중외제군사라는 높은 벼슬에 임명하며 환심을 샀다. 우문호는 이를 믿고 조정의 중신이었던 조귀와 독고신을 제거하고, 여러 전투에 나섰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무제는 우문호에게 계속 권력을 맡겼는데, 이를 통해 우문호의 반대 세력이 늘어나 결과적으로는 그를 제거할 정당성이 더 커졌다. 실제로 우문호가 제거되었을 때 그것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크게 적었다. 이는 동오의 [[손휴]]가 [[손침]]을, 청나라의 [[강희제]]가 [[오배]]를 제거한 것과 비슷하다. 우문호를 처참히 죽인 후 무제는 이 사실을 밖에 알린 뒤에 우문호의 아들들과 부하들을 체포해 모두 죽였다. 그리고 우문호 제거에 큰 공을 세웠거나, 능력은 있었지만 우문호 시대에 중용되지 못했던 우문헌, 이목, 울지형, 두치, 우문직, 육통, 우문효백, 우문초 등으로 새로운 조정을 구성했다. '''드디어 [[친정|자신의 뜻대로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때가 온 것이었다.''' === 무제의 정책 === ==== [[삼무일종폐불]] ==== 570년, 무제는 [[불교]]와 [[도교]]의 사제들을 모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도록 했다. 무제 우문옹은 도교쪽에 조금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관련 관직인 통도관(通道觀)을 설치하고, 도교에 관한 백과사전인 《무상비요》(無上秘要)를 편찬하게 했다. 사실 이 사소했던 일이 폐불정책으로 확대된 계기는 북주가 갖고 있었던 사회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북주의 인구는 1,000만명이 조금 되지 않았다. 그러나 100만 명가량이 승려였으며, 10,000여 곳에 사찰이 있었다. 불교는 북위의 국교가 된 이래 세력이 매우 방대해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불경이나 불상 건설을 위해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했다. 결국 무제 우문옹은 이를 부국강병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574년, 유학자들과 도교 및 불교가 갖고 있는 철학에 대해 두 번째 [[100분 토론|논쟁을 벌였다.]] 이때 무제는 [[유교]]를 첫 번째, 다음은 도교, 그 다음을 불교로 지정했다. 이때부터 도교와 불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도교에 대해서는 형식적이었다고 한다. 불경과 불상들을 불태우고, [[승려]]들은 강제로 서인으로 만들어서 사회에 환속시켰다. 이를 '''[[북주파불]]'''(北周破佛) 또는 북위 [[태무제]]에 이은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 부른다. 과정은 좋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중앙집권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가 빠르게 진행되어 [[결과는 좋았다|결국에는 국력이 성장했다]]. 여담으로, 이 일에 대해서 >"이런 짓을 하면 불[[지옥]]에 간다." 라는 승려들의 비난에 >"백성들이 편할 수만 있다면 내 몸이 불지옥에 가도 상관없다." 라는 위엄찬 태도로 받아버렸다. 과연 후대 불교 설화들에서는 무제 우문옹을 불지옥으로 보내서 지옥에서 >"불교를 박해하지 말걸." 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디스]]성 이야기들이 덧붙여진다. ==== 호화정책 ==== [include(틀: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민족 및 문화정책)] 북주의 영토인 관중 지방은 [[북제]]의 영토인 관동 지방에 비해 굉장히 낙후된 지역이었다. 북제 인구 약 2,800만 명, 북주 인구 약 1,100만 명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어야만 했다. 이로써 시작된 정책이 '''호화(胡化)정책'''이었는데, 원래 서위의 [[우문태]]가 시작한 정책이었다. 우선, 북위의 [[효문제]]가 황성인 탁발(拓跋)씨를 원(元)씨로 개칭한 것처럼 한성(漢姓)을 호성(胡姓)으로 개칭했고, 그들을 크게 우대했다. 예를 들어, 우수한 관료였던 유경은 우문씨, 구순은 약구인씨, 소숙은 을불씨로 성을 바꾸었다. 또 이러한 방식으로 한족을 선비화시켜서 강대한 군사력을 만들었다. 북위시대에 한화정책으로 많은 선비족이 한족화되었고 결국 선비족과 한족은 하나로 단결되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민족 모순을 격화시킬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관중의 한족 사족 집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치집단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선비족과 한족이 만나 형성된 북주의 새로운 정치 세력을 '''[[관롱집단]]'''(關籠集團)이라 부르는데, [[수문제]] 양견, [[당고조]] 이연 역시 이 관롱집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호화 정책으로 인해 북주만의 새로운, 위진시대를 넘어선 문화가 형성되었다. ==== 부병제 ==== 호화 정책과 함께 시행된 '''부병제'''(府兵制)는 북주의 강성한 군사력의 원동력이었다. 원래 [[서위]] 시절 권신인 우문태가 처음 조직했는데, 부병제 조직은 총 24군으로 구성되었고, 개부(開府)가 각각 1군을 통솔했다. 그 위에 대장군(大將軍)이 2군을 통솔했고, 그 위에 주국(柱國)이 4군을 통솔했다. 서위에는 총 6군이 있었고, 부병제에 의하여 6주국, 12대장군, 24개부로 계열화되었다. 부병제는 '''국민개병의 원칙'''하에 호한의 차별없이 모든 민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일반 민호들을 부병으로 선발하여 절충부에서 훈련하게 하는 제도였다. '''병농일치'''로 농민은 교대로 번상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면 향병이 되어 예비군을 조직했다. 이는 국가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국민 모두의 병력화를 가능케했다. 부병이 되면 장비와 식료를 스스로 부담하고 군마의 사육을 할당받는 대신, 군사훈련을 받을 동안에는 일반 민호와 구별이 되어 '''조용조와 역역을 면제받았다'''. 이 제도는 북주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단순히 군사제도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서위-북주가 부병제를 실시한 목적은, 동위-북제의 선비족 군벌 집단과도 다르고, 양나라의 한족 사족 집단과도 다른, 문무를 겸비한 단결된 통치집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원래 북위의 전통적인 병역 제도는 '''부락병제'''였다. 이 제도는 '''병농분리제'''로써 선비족 정권에 편입된 여러 소수 민족이 병역의 의무를 지고, 한족 백성들은 일반적인 병역 의무를 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위-북주의 부병제는 민족 출신이 아닌, 호등(집의 자산에 따라 나눈 등급)에 따라 결정되어서 6등 이상의 중상호에 해당하면 징병 대상자가 되었다. 이렇게 중상호 가구이면서 아들이 셋 이상인 사람 중에서 건장한 자를 뽑아 부병으로 삼았고, 관롱 지역의 호족(한족)이 중심이 되었다. 8명의 대장군이 군사를 지휘하는 주국대장군 제도는 흉노족과 선비족 초기의 8부 대인, 8국 대인 제도를 모방했고, 부락병 제도의 전통에 따라 모든 병사들은 장군의 성씨를 따랐다. 이로 인해 한족 병사들은 선비족 부락민으로 편입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한족이 선비족화되어 호화 정책이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또, 무제 우문옹은 여기에 다른 것을 결합했는데, 전쟁 노비를 해방하여 일반 농민으로 개편한 후,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균전제를 확대 실시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또한, 황무지 개간 및 수리 시설의 확대로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부병제를 균전제와 결합시켜 병농일치화하고, 부병을 황제에 직속시켜 황제의 군사 통제권을 강화시켰다. === 숙적인 [[북제]]를 멸하다 === || [[파일:북제-남진.png|width=500]] || || '''557년경 남북조의 형세''' || 이렇게 북주의 국력이 성장하는 사이, 당시 경쟁국이었던 북제의 황제 [[고위]]는 사치향락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화사개(和士開), 고아나굉(高阿那肱), 목제파(穆提婆), 한장란(韓長鸞) 등의 [[간신]]들을 신임한 탓에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무제 우문옹은 바로 지금이 북제를 정벌할 기회라 여기고 준비했다. 게다가 북제를 지탱하던 명장인 [[곡률광]](斛律光)과 난릉왕 [[고장공]](高長恭)이 이들 간신들의 손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북주의 장수 위효관은 북제의 곡률광을 싸움터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간첩을 파견해 >"고씨가 몰락하고 곡률씨가 흥한다." 는 내용의 시를 퍼뜨려 곡률광에게 누명을 덮어 쓰게 했다. 그 덕분에 황제 고위가 곡률광을 죽이자, 무제 우문옹은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575년, 마침내 무제는 대대적으로 북제 원정을 준비했으나 이런 사실은 비밀에 붙이고 우문헌, 왕의(王誼), 우익(于翼) 등과만 의논했다. 우선 낙양을 급습했으나 북제룬과의 공성전은 꽤나 힘들었고, 하필 북제의 우승상 고아나굉이 지원군을 이끌고 오면서 전세는 장기전으로 변해갔다. 북주군이 다시 역공 준비를 하던 도중 무제 우문옹이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북주군은 낙양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577년, 우문옹은 제1차 북제 정벌 때 미흡했던 점을 보완해서 다시 준비를 했고, 병이 나은 뒤에 다시 북제를 공격했다. 우선 평양(平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당시 북제의 황제 고위는 기연지(祁連池)에서 황후 풍씨[* 풍소련(馮小憐), 고위가 아끼던 애첩], 고아나굉 등과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보고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평양에 구원병도 보내지 않았다. 결국 평양이 함락당하자, 고아나굉이 고위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고위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무제 우문옹은 고위의 군대가 여전히 강하다고 생각하여 후퇴하고 평양에는 양사언(梁士彥)을 남겨 지키도록 했다. 북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평양을 공격했고 얼마 후 성벽에 구멍을 냈다. 다시 북제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이때 갑자기 고위가 공격을 멈췄다. '''왜냐하면 풍씨를 불러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유례를 찾기 힘든 [[막장 플레이]] 때문에 평양은 북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 상황에서 고위는 풍소련과 간신 목제파가 패닉 상태가 되어 도망가자고 하자 제2의 수도인 진양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북제의 군대는 와해되었으며 훌륭한 [[사망 플래그|국가 멸망 테크]]를 타게 되었다.('''평양 전투''') 진양으로 돌아온 고위는 사촌인 고연종(高延宗)과 고효형(高孝珩)에게 진양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삭주(朔州)로 도망가려 했지만 고연종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그는 먼저 태황태후 호씨와 아들 [[고항]](高恆)을 먼저 삭주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북주군이 진양에 다다르자 그는 진양을 고연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삭주나 돌궐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매승랑(梅勝郎)의 제안으로 수도인 업성으로 ~~도망~~ 갔는데 고아나굉도 함께 갔다. 이 상황에 이르자 당옹(唐邕)을 비롯한 북제의 신하들은 도망가기 바쁜 황제 고위보다 고연종이 새로운 황제에 오르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결국 고연종은 사양하다가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비정통 황제로 남아 있다. 다음날 북주군의 진양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동문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고연종의 북제군은 북주군을 막아 무제 우문옹이 거의 죽을 뻔 했다. 하지만 고연종의 북제군은 이 승리에 도취해 부대를 재편성하지 못했고, 다음날 북주의 공격으로 진양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북제 제2의 수도 진양의 함락은 북제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됐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진양 전투''') 무제 우문옹은 드디어 북제의 수도인 업성(鄴城)으로 진격했다. 고위는 업성에 도착하자 사람들에게 군대에 입대하면 보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풀어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또 그가 군대의 사기를 위해 연설을 했을 때 불손한 태도 때문에 장군들의 분노를 샀다. 더구나 이미 북주가 진양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장군들과 관료들도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고매(高勱)는 태황태후 호씨와 고항을 삭주에서 데리고 와 업성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자고 했지만 고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술가가 나라의 운이 다했으니 황제를 바꿔야 한다고 알렸고 이에 고위는 7살난 아들 고항에게 황위를 넘기고 자신은 스스로 태상황제가 되었다. 고항이 황제가 되었지만 태상황제 고위가 그대로 북제의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모다루경현(莫多婁敬顯)이 위상원(尉相願)과 같이 모의하여 간신 고아나굉을 죽인 후, 고효형(高孝珩)을 새 황제로 선언하려고 했다. 하지만 매복조가 고아나굉을 죽이지 못하면서 이 음모는 탄로나고 말았다. 고효형은 군대를 주면 자기가 북주를 물리치겠다고 청원했지만 고아나굉과 한장란은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여 창주(滄州)자사로 내보냈다. 이때 북주군은 이미 수도 업성에 당도했고, 태상황제 고위는 남쪽으로 달아나 저항군을 조직하고, 여의치 않으면 진나라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는 모용삼장(慕容三藏)에게 업성을 맡기고 자신은 제주(濟州)로 도망갔는데 이미 태황태후 호씨, 황태후 목씨, 아들 고항은 이미 보냈놓은 상태였다. 고위가 떠나고 모용삼장은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 업성도 곧 함락당했다('''업성 전투'''). 그 뒤 고위는 동쪽의 제주(濟州)에 도착해 어린 황제 고항의 이름으로 교서를 발표했는데 그는 황위를 숙부인 고개(高湝)에게 넘긴다고 했다. 그리고는 곡률효경(斛律孝卿)에게 옥새를 고개가 있는 영주(瀛州)로 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곡률효경은 옥새를 들고 북주에 가 버렸다. 고위는 더 동쪽인 청주(青州)로 도망갔고 거기서 진나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고아나굉(高阿那肱)은 북주군과 접촉하고 있었고 고위를 북주에게 넘겨주려 일부러 천천히 내려갔다. 북주군이 제주에 도착하자 고아나굉은 항복했고 북주군은 빠르게 청주로 갔다. 고위는 도망가려 했지만 북주의 장수 울지근(尉遲勤)에게 사로잡혀 황태후와 함께 업성으로 끌려갔다. 고위와 고항이 포로가 됨으로써 북제는 사실상 멸망했다. 무제 우문옹은 업성에 들어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웅안생(熊安生) 등의 훌륭한 유학자들을 등용했다. 모용삼장(慕容三藏)도 북주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우문옹이 그를 예로 대우하자 결국 그도 항복했다. 반면 막다루경문을 비롯한 간신들은 모두 끌어내 목을 베었다. 무제 우문옹은 곡률광의 집을 본 뒤, >'''곡률광이 있었다면 짐이 어찌 업에 도착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하며, 곡률광의 자손들을 위로하고 땅을 주어 살아가도록 해주었다. 그 뒤 북주의 수도인 장안으로 끌려온 고위와 고항을 비롯한 고씨 일족은 577년 10월, 무제 우문옹에게 모조리 멸족당하고 말았다.[* 라고는 하지만 그리 머지 않은 미래인 당나라 초기의 [[고사렴]]은 다름아닌 북제의 황족 출신이었다.] '''이로써 무제 우문옹은 534년에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이래 43년만에 다시 화북을 통일했다.(577)''' === 붕어 === 북제를 멸망시킨 후에도 무제 우문옹은 자만이나 방심하지 않고 남아 있는 북제의 저항 세력을 제압했다. 북제의 낙주자사였던 독고영원을 비롯하여, 고장공의 옛 부하였던 울상원, 중단성을 끝까지 사수하던 부복처럼 북제의 충신들도 결국 무제 우문옹에게 항복했다. 특히 부복이 항복할 때 무제 우문옹이 이렇게 물었다. >'''왜 이제서야 온 것이오?''' 부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3대에 거쳐 제나라의 녹을 먹었습니다. 스스로 죽지 못하였으니 하늘과 땅을 보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문옹은 이를 듣고, >'''신하라면 응당 이와 같아야 한다!''' 라고 칭찬하며 북주의 벼슬을 주었다. 마치 [[문빙]]이 [[조조]]에게 투항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게다가, 무제는 장안으로 돌아온 후, 조서를 내려 과거 우문호가 화려하게 꾸민 전각들을 모두 허물도록 하고 값비싼 물건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검소한 생활을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배산 전투|배산]]에서 한판 스파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대륙의 통일 왕조와 고구려 간에 벌어진 9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578년, 북제의 일부 황족들이 돌궐로 달아나자 무제 우문옹은 원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병이 악화되어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원정을 중지하고 장안으로 돌아온 우문옹은 우문효백(宇文孝伯)에게 황태자 우문윤을 잘 보필해줄 것을 명령하고 붕어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6세였다.''' 제위는 황태자 [[우문윤]]이 계승했으나 그는 [[호부견자|아버지와 달리 매우 포악하고 무능했다]]. 결국 선제 우문윤은 나랏일을 전부 장인이었던 [[양견]]에게 맡기고 사치향락에 몰두했는데 그가 붕어하자 양견이 어린 황제인 [[정제(북주)|정제 우문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했다. 결국 북주는 무제 우문옹이 붕어한 지 겨우 3년 만에 멸망했고, 우문씨도 멸족되었다. == 평가 == 재위 초반기에는, 월왕 [[구천]]에 버금가는 인내심을 보여준 끝에 권신 우문호를 죽여 형들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실권을 잡았고, 그 뒤에는 조정을 새롭게 개혁하고 인재를 우대하여 북제까지 멸망시키는 군사적 능력, 행정적 능력, 도덕적 능력을 모두 갖춘 [[팔방미인]]이자 뛰어난 [[엄친아]]였다. 또한 《[[자치통감]]》에 따르면 매우 검소하여, 항상 무명 옷을 입고 무명 이불을 덮고 잤으며 후궁도 1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할 정도로 충성스럽게 만들었고, 과감히 결단하며 법을 엄격히 적용했다. 거기다가 겨우 복수에 성공한 것만으로 헤이해진 구천과 달리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 결국 총평을 내리자면, [[막장]] 황제들이 즐비했던 남북조시대에 큰 획을 그은 엄청난 [[명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주시대의 관롱집단은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주요 세력이었기도 했고 말이다. 36세의 너무나 이른 나이에 요절했기에 진나라의 황제 [[진숙보]]의 존재를 감안하면 10년만 오래 살았더라도 천하를 통일했을 수 있다.[* 실제 천하를 통일한 [[수문제]] 양견과 무제 우문옹은 2살 차이였다. 그마저도 수문제가 2살 연상이었다.] 결국 요절해 버린 것이 너무나도 아쉬운 군주일 뿐. 중국의 대분열기를 거의 다 수습한 명군이었지만 천하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너무나도 안타깝게 요절했다는 점과,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조가 교체되어 버렸다는 점에서는 [[오대십국시대]] [[후주]]의 [[시영|세종]]과도 매우 비슷하다. 또한 둘 다 주나라의 황제이고 30대에 요절했으며, 다음 [[수나라|왕]][[북송|조]]에서 전국통일을 달성하고 불교를 억제한 [[삼무일종법난]]을 일으킨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다. 삼무일종법난은 시호에 '무'자가 들어가는 3명의 황제와 '종'자가 들어가는 1명의 황제가(삼무일종) 불교 억압 정책을 펼쳤다는 것(법난)을 의미한다. == 대중매체에서 == 2013년 중국드라마 <난릉왕>에서는 홍콩 배우 진효동이 연기를 맡았다. 북제 난릉왕 [[고장공]]과 여자 주인공인 양설무와 [[삼각관계]]를 이룬다. 2016년 중국드라마 <난릉왕비>에서 배우 팽관영이 우문옹 역할을 맡았다. 2013년 작품처럼 군주로서는 성공하지만 연애에는 실패한다. 2018년 중국드라마 <독고천하>에서는 배우 응호명이 우문옹 역할을 맡았다. [[독고가라]]와 연인이지만 독고신의 반대로 결혼하지는 못한다. 돌궐의 공주를 황후로 들였다. 건강이 좋지 않다. 2019년 중국드라마 <독고황후>에서는 배우 척적이 우문옹 역할을 맡았다. 2020년 중국드라마 <체가의녀>에서는 위구르족 출신의 배우 미열이 우문옹 역할을 맡았다. 주인공이 따로 있는 위의 작품들과 다르게 조연이 아니고 남자주인공이라 작품내 대우가 좋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주서)] [include(틀:북사)]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543년 출생]][[분류:578년 사망]][[분류:서출]][[분류:웨이난시 출신 인물]][[분류:중국의 객사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