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33년 출생]][[분류:1981년 사망]][[분류:이란 대통령]][[분류:이란의 무슬림]][[분류:암살된 인물]][[분류:폭발물에 죽은 인물]][[분류:객사한 인물]] [include(틀:역대 이란 대통령)] [include(틀:역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총리)] محمدعلی رجائی [[파일:Portrait_of_Mohammad-Ali_Rajai.jpg]] (1933. 6. 15 ~ 1981. 8. 30) (향년 48세) [목차] == 개요 == [[이란]]의 [[정치인]]으로, 제2대 [[대통령]]이자 제47대 [[총리]]. == 생애 == [[카즈빈]]에서 태어났으며, 4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10대 후반에 [[테헤란]]으로 이주했고 [[이란 공군|공군]]에 입대했으며, 제대 후 타르비아트 모알렘 대학교(현재 하라즈미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일찍이부터 [[이란 제국|군주제]]에 반감을 드러냈으며, 반체제 조직인 이슬람의 희생자들에 합류하는 등 반정부 인사가 되었다. 잠시 [[이란 인민전사기구|인민전사기구]]에도 속해 있었지만, [[우익]] 성향이었던 그는 인민전사기구의 [[좌익]] 성향에 반감을 갖고 탈퇴, 중도파 성향의[* 다만 말이 좋아 중도파지, 엄연한 [[이슬람주의]]를 내세우는 우파 성향이다.] 이란 자유운동에 합류했다. 결국 당국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으며, 비슷한 시기 [[국제연합]]에 자신의 고문 당한 맨발을 공개하면서 [[팔라비 왕조]]의 인권 탄압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팔라비를 향한 범국민적 반감은 [[이란 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팔라비는 실각하고 만다. 혁명을 주도한 [[루홀라 호메이니]]가 [[라흐바르|최고지도자]]를 맡되, [[대통령 직선제]]를 가미한 특유의 이슬람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라자이는 메흐디 바자르간 총리 밑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허나 혁명의 성과와는 달리, 막상 신설된 대통령직은 중도파인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차지했고, 라자이는 총리직을 차지하면서 일종의 [[동거정부]]가 형성되었다. 당연히 내분이 잦았고, 호메이니의 눈 밖에 나버린 바니사드르는 결국 국회의 [[탄핵]] 소추를 맞고 축출된다. 호메이니의 신임을 얻은 라자이는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었고, 바로 치러진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경쟁 후보들은 라자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공화당]] 소속이었다. 즉 말 그대로 경선이 곧 본선이 된 꼴인데, 이 이유는 1980년 총선에서 호메이니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공화당이 원내 1당이 되었음에도 의석수가 너무 모자라서 반대파들의 잦은 견제에 시달렸고, 결국 '''모든 [[야당]]을 해산하고 사실상 [[일당제]]를 구축한 것'''. 허나 이 당도 내분화되면서 말 그대로 "[[일당 독재]]"로 가는 일은 없었고, 1987년 해산되면서 다시 [[다당제]]화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에 취임한지 1개월도 채 안 된 1981년 8월 30일 [[모함마드자바드 바호나르]] 총리와 함께 최고국방회의 회의를 진행하던 중 인민전사기구의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 한때 라자이가 인민전사기구 소속이었다가 등을 돌린 것으로 봐서 인민전사기구가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고 보복한 것일 지도 모르지만, 용의자 마수드 케슈미리가 잠적하면서 [[진실은 저 너머에]]. 정부는 5일 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유해는 [[https://fa.wikipedia.org/wiki/%D8%A2%D8%B1%D8%A7%D9%85%DA%AF%D8%A7%D9%87_%DA%A9%D8%B4%D8%AA%D9%87%E2%80%8C%D8%B4%D8%AF%DA%AF%D8%A7%D9%86_%D9%87%D9%81%D8%AA%D9%85_%D8%AA%DB%8C%D8%B1|7월 7일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임으로는 [[알리 하메네이]]가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