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8000 0%, #008000 20%, #008000 80%, #008000)" '''{{{#fecd21,#ddd {{{+1 孟獲}}}[br]맹획}}}'''}}}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engHuo.jpg|width=100%]]}}} || ||<:> '''[[직위|{{{#FEDC21 최종 직위}}}]]''' ||<(> 어사중승^^(御史中丞)^^ || ||<:> '''[[성씨|{{{#FEDC21 성씨}}}]]'''||<(> 맹^^(孟)^^ || ||<:> '''[[이름|{{{#FEDC21 이름}}}]]'''||<(> 획^^(獲)^^ || ||<:> {{{#FEDC21 '''생몰 기간'''}}} ||<(> ? ~ ? || ||<:> '''[[고향|{{{#FEDC21 고향}}}]]'''||<(> 익주^^(益州)^^ 건녕군^^(建寧郡)^^[* 《화양국지》에 따르면 건녕 사람이라고 한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남만]] 지역 부근에 자리잡았던 [[호족]]. 흔히 남만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후술되어 있듯 정작 맹획이 남만계 이민족이었단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서는 없다. == [[삼국지(정사)|정사]] == [[배송지]]가 주를 달 때 인용한 <한진춘추>에서 처음 언급되는 인물. [[화양국지]]와 양양기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건녕에 거주하는 [[한족]]과 소수민족 모두의 지지를 받을 정도로 인망이 두터웠으며 익주 남부에서 [[옹개]]가 반란을 일으키자 월준군 수족의 왕 [[고정(삼국지)|고정]] 등과 연합했고 촉한과 적대했는데, 225년에 [[제갈량]]이 남방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출병하자 이에 대항하였다. 여름 5월에 제갈량이 노수를 건너 익주군을 평정하자 맹획은 이때 사로잡히고 제갈량이 군대와 진영을 보여주면서 군대가 어떻냐고 묻자 자세히 보아 알게 되었으니 이길 수 있다고 했으며, 제갈량은 맹획을 용서한 후에 돌려보내 싸우게 했다. 맹획은 여러 번 싸웠지만 7번 사로잡히고 7번 용서받자 제갈량에게 복속했으며, [[제갈량]]이 다시 묻자 나쁜 뜻을 갖지 않겠다고 했으며, 맹획은 관리로 등용되어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사서에는 [[칠종칠금]]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있는데, 딸랑 한 줄만 언급될 뿐, 칠종칠금 과정의 상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칠종칠금]] 문서로. 기록상으로는 맹획이 이민족이라는 말이 없고 같이 반란을 일으킨 고정이 이민족 족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고정은 제갈량에게 처형당했고 맹획은 촉에 항복한 후 높은 관직까지 올랐다고 한다. == [[삼국지연의|연의]] == [[고정(삼국지)|고정]]과 지위가 뒤바뀌어 수족의 왕이었던 고정이 뜬금없이 월준태수가 되고 자신은 남만의 어느 부족의 왕으로 등장한다. 225년에 10만 대군을 이끌고 익주에 침입했고 군의 태수들도 많이 그에 협력했으며, [[촉한]]의 전권을 맡아 있던 승상 [[제갈량]]은 먼저 역내의 주군을 평정하고 남중의 풍부한 물자를 얻고자 직접 원정에 나섰으며, 맹획은 제갈량에게 대항하면서 자신이 싸우다가 남만 주변의 여러 세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끝에 모두 패배하고 일곱 번 사로잡히고 일곱 번 풀려나자 그 은의에 감복해 진심으로 항복하면서 제갈량은 그로 하여금 남만의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칠종칠금]] 일화로 유명하다. 잡힐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승복하지 못하는 찌질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축융이 장억과 마충을 잡았을 때 제갈량이 전에 풀어줬던 은혜를 생각해서 살려주기도 한다. 후에 축융이 촉군에 사로잡혔을 때 포로교환으로 이 둘을 돌려보낸다. 맹획이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한족이 아닌 운남의 소수민족 수장으로 이미지가 남으면서 정체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었는데 그중에서 [[미얀마]] 북부 샨 주(Shan State)에 속하는 민족인 "[[와족]](佤族, Wǎzú, 바족)"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20세기까지 사람 사냥을 한 종족이라 아닐 수도 있다. 인구 70만명.] [[사천성|사천]]([[쓰촨 성|촉]]), [[운남성|운남]] 지방의 "[[이족]](夷族, Yízú)"[* [[티베트]]계 민족으로 강족의 후예다. 인구 776만명.]에게는 맹획이 제갈량을 사로잡았다는 전설도 있다.[* 혼전중에 제갈량을 바로 앞에 두고 촉나라 장수와 싸우다 목이 잘렸는데, 맹획이 도술을 써서 잘린 목을 다시 붙이자 촉나라 군대가 놀라 도망가는 바람에 제갈량을 잡았다는 이야기.] 그 외 몇몇 부족에게도 맹획의 전설이 있는데, 맹획이 유명 인물이었기 보다는 역으로 [[중국]]에서 퍼졌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간 남만인이라고 죄다 [[베트남]]인이 아닌데, 당시 [[베트남]] 북부는 엄연히 [[오(삼국시대)|오나라]]의 땅이었다. 그래서 남만을 해석하면 남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단순히 베트남인이 아니라 중국 남부에 사는 소수민족이나 호족들을 뜻하는 걸로 추측된다.[* 한국에서는 국내에 [[베트남인]]들이 많기도 하고 많이 변했지만 어쨌든 [[한자 문화권]]에 속한다는 등의 이유로 [[동남아시아]]라고 하면 무조건 [[베트남]]을 떠올리고 보는 경향이 강한데, 정작 베트남 인구는 동남아시아 전체 인구의 1/5도 채 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 전체 인구는 6억 5500만, 베트남 인구는 9600만이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내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나라도 아니다. 실제로 동남아시아에서 단일 국가로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는 [[인도네시아]]로 2억 7000만이다.] 정사에서 같은 포지션인 고정은 수족이라고 나오며 현대에 존재하는 수족과는 다르다. 창작물에서는 흔히 단순무식한 인물로 나오지만 연의 원작에서는 의외로 힘싸움보다는 두뇌플레이를 더 자주 시도하는 편이고 본인도 내가 남만인이지만 이래봐도 병법을 통달했다고 자뻑하기도 한다. 하필 상대가 제갈량이라서 매번 역으로 당할 뿐, 실제 맹획이 그저 단순무식하기만 한 인물이었다면 제갈량도 굳이 애써 개고생하며 맹획을 어떻게든 복종시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맹우(삼국지)|맹우]], [[축융(삼국지)|축융부인]], [[올돌골]], [[대래동주]], [[타사대왕]], [[목록대왕]] 등 남만정벌 관련으로 나오는 다른 인물들은 모두 [[삼국지/가공인물]]이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 기준으로, 87회에서는 맹획이 권모적토마[* 捲毛赤兔馬. 털이 곱슬곱슬한 [[적토마]]]라는 말을 탔다고 나온다. 그런데 89회에서는 맹획이 적모우[* 온 몸에 붉은색 갈기가 난 황소]를 탔다고 적혀있다.[* 축융도 모종강본 삼국지연의 90회에서 권모적토마를 타고 나와서, 삼국지 시리즈에선 맹획이 적모우, 축융이 권모적토마를 가지고 나온다.] == 기타 == [[이문열]]은 맹획을 강대국의 팽창주의에 대항하는 소수민족 독립운동가의 원형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사에서 맹획이 이민족이라는 이야기는 없지만, 현재 [[운남성]]은 비한족 소수민족이 인구의 절반 이상이기 때문에 딱히 맹획을 이민족으로 봐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했을 때 등용되고, 5차 북벌 때 [[사마의]]가 1만 기병으로 기습을 가하자 제갈량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이에 대적한 [[맹염]]이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정황상 맹획의 친족으로 보인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맹획/기타 창작물)] [각주] [[분류:촉한의 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