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1차 세계대전의 전투 목록)] ||<-3><:> [[파일:sr5y1o7vck021.jpg|width=500]] || ||<-3><:> 말메종 전투 당시 진격하는 프랑스 보병들 || ||<-3><:> {{{+1 '''말메종 전투'''}}} || ||<-3><:>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3><:> [[1917년]] [[10월 23일]] ~ 1917년 [[10월 27일]] || ||<-3><:> '''장소''' || ||<-3><:> [[프랑스]] 말메종 시, 엔 강 || ||<:> '''교전국'''||<^|1>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독일 제국]] ||<^|1>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프랑스 제3공화국]] || ||<:> '''지휘관''' ||<^|1>[[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막스 폰 뵌 [br]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3]] [[에리히 루덴도르프]] ||<^|1>[[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필리프 페탱]] [br]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파울 메스트르 || ||<-3><:> '''결과''' || ||<-3> [[프랑스군]]의 결정적 승리 || ||<:> '''병력''' || 7개 사단 || 6개 사단 || ||<:> '''피해규모''' || 18000~50000 명 || 12000~14000 명 || [목차] Battle of La Malmaison == 개요 ==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 [[독일 제국군]] 간의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독일은 서부전선에서의 승리 기회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훗날의 [[백일 전투]]와 함께 독일군에게 프랑스군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된 전투였다. 독일군의 프랑스군 공포증은 전후에도 계속되어 [[전간기]] 한동안 [[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눈치를 보면서 군사행동을 조심스레 하는 일까지 이른다. 독일의 프랑스군 공포증은 [[제 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나서야 비로소 끝나게 된다. 여하튼 다시 1차대전으로 넘어와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말메종 고지를 공격하게 된 이유는 첫째, [[니벨 공세]]에서의 치욕을 씻기 위함이었고, 둘째, 독일군의 서부 방어선을 무력화할 생각이었으며, 셋째, 1917년 [[4월 6일]]부터 전쟁에 가담한 [[미군]]이 본격적으로 대규모로 오기 전까지 혹시 모를 독일의 공세 능력을 약화시킬 선제공격이었고, 마지막 넷째, [[영국군]]과 미군보다 더 많은 공을 세워 승전 후 최고지분을 가질 목적이었다. == 전개 == 아무 생각없이 진행된 [[로베르 니벨]]의 니벨 공세와는 달리, 말메종 공세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전개되었다. 일단 프랑스군은 10월 23일 밤, 독일군이 한창 피곤할 틈을 노려 평상시와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가행했다. 독일군도 그 정도의 포격은 평상시에도 항상 있었던 수준인지라 별로 신경쓰지 않고 방심했다. 그러나 날이 밝자 프랑스군은 포격의 강도를 세 배나 높였다. 평상시에 보지 못한 수준의 엄청난 포격의 화력에 독일군은 우왕좌왕했고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 또 하필 23~24일 날은 독일군 진영 쪽에 [[먹구름]]과 [[안개]]가 잔뜩 끼어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바람]]까지 독일군 참호 쪽으로 무섭게 불어댔기 때문에 [[독가스]]도 평소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이미 간파한 프랑스군은 독일군 [[참호]]를 향해 엄청난 양의 [[염소(원소)|염소]] 가스와 [[겨자 가스]]를 살포하였고, 독일군은 치명타를 입었다. 포격은 계속되었으며, [[포병]]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프랑스 [[보병]]들은 안전하게 '''몇 시간만'''에 3km를 돌파할 수 있었다. 평소 [[참호전]]이 '''1~3km 돌파하는 데에 며칠 간'''이나 걸리면서 아무 의미없는 [[소모전]]이나 치렀던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견딜 수 없게 된 독일군이 도주하자 프랑스군은 더 확실히 독일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투입했다. [[생샤몽]], [[슈나이더 CA1|슈나이더]]를 비롯한 대규모 부대였다. 하지만 전투 첫날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포병의 격렬한 포격으로 포탄 구덩이가 너무 크게, 너무 많이 생기는 바람에 전차가 포탄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의해 격파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말메종 전투 때 총 63대의 전차가 동원되었는데, 그중 40대가 전투 첫날 그런 식으로 별 성과없이 격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군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반대로 독일군에겐 전혀 재기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기습적인 포격과 보병 공격으로 무너진 독일 제국군의 떨어진 사기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프랑스군은 남은 '''28대의 전차만으로도''' 충분히 남은 독일군 진지와 참호를 주워담으며 진격했다. 전차, [[장갑차]], 포병, [[기관총]], 그리고 [[화염방사기]] 등으로 중무장한 프랑스군은 속전속결로 진격했고, '''2년 동안 전혀 무너지지 않았던 말메종 요새는 고작 4일 만에''' 프랑스군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 공세로 프랑스군은 니벨 공세 이후로 떨어졌던 자신감을 회복했고, 독일군을 보다 동쪽에 위치한 엘레트 강까지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 그 이후 == 이 전투는 가히 포병과 보병, 그리고 전차와 장갑차를 거두로 한 기갑부대의 종합적인 전술이었다고 봐야 한다. 거의 성공적인 제병 합동 전술의 시초라고 봐도 무방하다.[* 영문위키에선 캉브레 전투를 제병 합동의 시초로 보는데, 실질적인 제병 합동의 시초는 오히려 말메종 전투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말메종 전투에서 항공대와 보병-전차, 포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제병 합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 이후, 전차를 잘 활용하기만 하면 전투에서 얼마나 큰 효과를 볼 수 있는지 모든 참전국이 톡톡히 깨닫게 되었고, 이 사례는 종전 이후 여러 나라들이 더욱 전차 개발에 혈안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그들이 자랑하던 3중 참호 요새가 고작 4일 만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앞으로 연합군의 공세를 어떻게 막아낼까 노심초사하며 고민하게 되었다. 이 공세는 독일 내에서 승리를 자부하는 독일 군부에 대한 의심을 슬슬 불러일으킨 사건 중 하나였다. 또한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독일 제국은 전쟁에서의 승리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다. 이 전투는 독일군이 프랑스군보다 더 많은 [[사단(군사)|사단]]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프랑스군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었던 첫 전투인데, 프랑스군 사망자는 최대 1만 4천명까지 집계되는 것에 비해 독일군은 최대 5만 명 가량 사망하였다고 집계되기도 한다. 이 정도의 피해는 당시 독일 제국군이 감당하기는 너무 어려운 피해였다. 이후 독일 제국군 최후의 공세인 [[루덴도르프 공세]] 때에 잠시 말메종 요새를 다시 탈환하기도 하나, 이미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은 말메종 요새에 대한 공략법을 터득한지 오래였고, 독일 제국군 전체에 대한 공략법도 터득한지 오래였다. 백일 전투 당시 프랑스군은 또 한번 말메종 요새를 탈환하였으며, 독일군은 완벽하게 괴멸되었고 결국 패배하게 된다. [[분류:제1차 세계 대전/전투]][[분류:1917년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