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독일 제국의 정치인]][[분류:1875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출신 인물]][[분류: 암살된 인물]] ||<-2> '''{{{+2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br]Matthias Erzberger'''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89-072-16,_Matthias_Erzberger.jpg|width=100%]]}}} || ||<|2> '''출생''' ||[[1875년]] [[9월 20일]]||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부텐하우젠|| ||<|2> '''사망''' ||[[1921년]] [[8월 26일]] (향년 45세)|| ||[[바이마르 공화국]] [[바덴]]||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 || '''신체'''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이름 ,,(관계),,|| || '''학력''' ||학교명 학부명 {{{-2 (학과명 / 재학 여부)}}}|| || '''종교''' ||종교|| || '''직업''' ||작가, 정치인|| || '''소속''' ||[include(틀:독일 중앙당)]||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width=150]]}}}||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에 기여한 평화파 정치인이다. == 생애 == 뷔르템베르크의 수공업자 집안에서 태어나 기자로서 활동했다. 1903년에 가톨릭 민주파 성향의 [[독일 중앙당]]의 당원으로 들어가고, 독일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식민주의 전문가였으나 식민주의에 반대했고,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부르크프리덴[* Burgfrieden: 전시 상황을 고려한 정당들의 [[거국중립내각|예외적 연합]]] 정권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1917년에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지만, 오히려 전쟁이 독일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1918년 11월 7일부터 평화파로 전향한 뒤 [[막시밀리안 폰 바덴]] 정부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 밑에서 종전안을 추진한다.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1918년 당시 대표단 수장으로서 휴전협정에 서명한 점에 더하여, 종전 이후 종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에르츠베르거는 패전의 얼굴마담이 되어버렸고, 이는 독일 국수주의자들에게 원망을 사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일간지인 Tägliche Rundschau(매일신문)이 "그는 총알과 같이 둥글지만 방탄인 것은 아니다(he may be as round as a bullet, but he is not bullet-proof)."라는 논평을 내는 등, 에르츠베르거는 사회 전체의 공적(公敵)이 되어 사방에서 신변의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결국 1921년 8월 26일에 바덴 공화국(Republik Baden)[* 현재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Land Baden-Württemberg)]의 바트 페터슈탈 그리스바흐(Bad Peterstal-Griesbach)에서 [[내셔널리즘|민족주의]] 단체인 "게르만 기사단(Germanenorden)"의 일원에 의해 암살당한다. == 기타 == [[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다니엘 브륄]]이 에르츠베르거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