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파일:마선구 2100호 조감더ㅗ.jpg]] ||<-3>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4> 이름 || 한국어 ||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 || 영어 || Capital Cities and Tombs of[br]the Ancient Koguryo Kingdom || || 중국어 ||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 || 프랑스어 || Capitales et tombes[br]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 |||| 국가·위치 || [[중국]] [[지린성]] 지안 || ||<-3> [include(틀:지도,장소=41.101044 126.146588, 너비=100%, 높이=224px)]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04년]] || |||| 등재기준 || (i)[*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iv)[*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v)[*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1135|1135]] || [목차] == 개요 == [[중국]] [[지린성]] 지안시 마선향의 북쪽 홍성촌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의 4세기 후반 무렵의 왕릉급 적석총. [[통구 고분군 #s-3|마선구]] 2100호(JMM 2100)로 편호되었다. 2004년에 [[고구려 왕릉]]으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장군총]], [[태왕릉]] 등의 무덤과 함께 등재되었다. 무덤의 묘주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봉상왕]] 혹은 [[소수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krcn&contentsId=GC05301681|#]] == 무덤의 구조 == [[파일:마선구 2100호 전경.jpg]] 한변 약 30m 가량의 대형 적석총으로 다른 왕릉급의 초대형 적석총에 비해서는 규모가 다소 작다.[* 물론 [[장군총]]도 한변 30m 정도지만 높이나 완성도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석총의 형태 상으로는 완성형의 바로 직전 형태 정도에 비견될 수 있다. 기단부의 석재는 [[우산하 992호]]정도로 정연하지는 않지만 [[산성]]의 성벽쌓기 방법 중 허튼층쌓기처럼 층과 와꾸(...)를 맞추어 쌓아 올렸다. 가장 위의 사진처럼 마선구 2100호분은 기단의 아래까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일반적인 봉토분이 [[무덤]]을 만들기 전에 [[정지 #s-3|정지(整地)]] 작업을 거쳐 땅을 고르게하면서 다지는데 적석총의 경우엔 정지작업을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단의 각 모서리 석재의 아래에 큰 돌을 괴어 지지력을 보완한 것이 보고되었다. 이는 즉 [[장군총]]이나 [[태왕릉]]처럼 기단의 아래에 정연한 석재로 기초를 둔 형태에 선행하고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매장 주체부는 [[태왕릉]], [[천추총]] 이전 단계가 다 그렇듯이 광실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만 제시되어있을 뿐 구체적이지 않다. 수혈식(竪穴式)의 석곽으로 보기에는 장막걸이쇠라는 횡혈식(橫穴式) 석실에 사용되는 장구(裝具)가 확인되고 반대로 보자니 적석 상부 구덩이가 얕아서 쉽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선구 2100호분은 [[우산하 992호]], [[서대총]], [[칠성산 211호]]보다는 늦은 적석총으로 보고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유물이 [[태왕릉]] 다음으로 많이 출토되었는데 연대가 대부분 4세기의 늦은 편에 해당한다. 와당의 편년 상으로도 권운문 와당이 나오지만 권운문 와당 가운데서 완성된 형태, 즉 늦은 시기에 해당하며, 국형운주[* 국화모양의 말 장식]의 형태도 비교적 긴 것으로 상술한 3개의 적석총보다는 늦은 형태이다. 따라서 보통은 [[천추총]]보다는 빠르고 [[우산하 992호]]보다는 늦은 적석총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다른 고분에 비해서 확실친 않다. 다만 확실히 4세기 중엽에서 후반에는 걸쳐있다고 의견이 모아져 있다. == 여담 == 4세기 이후의 왕릉치고는 매우 작은 편이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아예 왕릉에서 제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금동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보니 결정하기가 쉽지않다. 단독입지하는 점이나 작다하더라도 분명히 큰 고분이라는 점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가 어렵다. [[신라]]로 치면 [[금관총]]이 마립간의 무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도라고 보는 것과 유사하다. == 같이보기 == * [[고구려왕릉]] * [[고분문화 #s-2|고구려의 고분문화]] * [[통구 고분군]] [[분류:고구려/고분]][[분류:고구려 왕릉]][[분류: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