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2> {{{#ffffff {{{+3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 }}}[br]{{{-1 [[라틴어|{{{#white 라틴어}}}]]: Marcus Valerius Maximus Messall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조부)[br][[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br][[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기원전 188년 집정관)|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아들)[br]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손자)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26년 || ||<#800080> {{{#ffffff '''전임''' }}}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br][[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기원전 22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br][[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기원전 225년 집정관)|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는 기원전 28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는 기원전 263년 집정관, 기원전 252년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메시나 공략에 성공하고 [[고대 카르타고]]-[[시라쿠사]] 연합군을 물리치고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의 귀순을 받아낸 뒤 메시나 함락을 기념해 메사나를 본딴 메살라(Messalla)를 자신의 아그노멘으로 삼았다. 이후 후손들은 대대로 메살라를 코그노멘으로 사용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226년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사료에서는 두 집정관의 행적에 대해 전혀 전하지 않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0년, 그의 친척인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의 지휘하에 시칠리아 함대 지휘관을 맡았다. 그 해 연말에 라이비누스가 로마로 떠났을 때, 그는 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를 습격해 유티카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풍부한 전리품을 확보한 후 13일 만에 라이베이움으로 데려갔다. 얼마 후, 포로들이 [[하스드루발 바르카]]에게 보내기 위해 아프리카 전역에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으며, 하스드루발이 장차 시칠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그는 즉시 로마에 이 소식을 전했고, 라이비누스는 원로원에 그를 시칠리아 방어를 위한 [[독재관]]으로 지명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런 임명은 로마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며 거부했고, 민회는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했다. 라이비누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비밀리에 로마를 떠났다. 결국 선거는 무효 처리되었고, 라이비누스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시칠리아에서의 지휘를 기원전 206년까지 수행할 수 있었다. 이후 기원전 206년까지 시칠리아 해군을 이끌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기원전 188년 집정관)|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기원전 188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손자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기원전 16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