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 }}}[br]{{{-1 [[라틴어]]: Lucius Cassius Longinus Ravill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07년 집정관)|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br][[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96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27년 || ||<#800080> {{{#ffffff '''전임''' }}}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28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br][[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루푸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기원전 12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800080> {{{#ffffff '''후임''' }}}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126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br][[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기원전 126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아버지가 기원전 171년 집정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71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라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64년 집정관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64년 집정관)|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그의 한쪽 눈동자 색깔이 회색이고 다른 눈동자 색깔이 노란색이었다고 전해졌으며, 이로 인해 '라빌라(Ravilla)'라는 아그노멘이 붙여졌다고 한다. 기원전 137년 [[호민관]]을 맡은 그는 민회에서 투표를 비밀리에 진행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와 다른 호민관 마르쿠스 안키우스 브리소 등이 이에 반대했지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한 저명한 인사들이 그를 지지한 덕분에 법안이 통과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직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30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2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기원전 12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이때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125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141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캄피돌리오 언덕|카피톨리누스 언덕]] 정상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에 알반 산맥의 시냇물을 공급하는 아쿠아 테풀라 수로 건설을 완료헀다. 또한 전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의 집이 지나치게 호화스럽다며 질책했다. 기원전 113년 간음 혐의로 기소된 두 명의 [[베스타]] 여사제인 마르키아와 리키니아가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에 민중은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그에게 사건을 재심사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베스타 여사제와 그들의 연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집행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엄격하지만 공정한 판사로 명성을 떨쳤고, 모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고 한다. 또한 로마에서는 '재판관 카시우스'라는 표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두 아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07년 집정관)|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96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각각 기원전 107년과 기원전 96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