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br]{{{-1 [[라틴어]]: Lucius Munatius Plancus }}} }}} || |||| [[파일:400px-Bust_of_Plancus_IMG_9753.jpg|width=300]]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기원전 87년 ~ 기원전 15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티볼리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가이타 || ||<#800080> {{{#ffffff '''지위''' }}} ||평민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아버지)[br]가이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형제)[br]티투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형제)[br][[마르쿠스 티티우스]](조카)[br]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아들)[br]무나티아 플란키아(딸) || ||<#800080> {{{#ffffff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br][[무티나 내전]][br][[페루시아 내전]][br][[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42년 || ||<#800080> {{{#ffffff '''전임''' }}} ||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br][[가이우스 카리나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안토니우스]][br][[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는 해방자파를 지지했다가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자 삼두정치파를 자처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심복이 되었다가 [[옥타비아누스]] 편에 섰고, 내전 종결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도 거물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 생애 == 기원전 87년 티볼리 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또는 조부 대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으며, 아버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는 티볼리의 유지였다. 형제로 가이우스와 티투스가 있었으며, 조카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처형을 명령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하고 나중에 [[옥타비아누스]] 편에 선 뒤 기원전 31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티티우스]]가 있었다. 초기 경력은 불분명하나 평민으로서 출세를 위해 군대에 입대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단행할 당시 참여하여 기원전 54년경과 카르누테에서 겨울 숙영하는 군대를 이끌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 편에 섰고,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난 카이사르를 따라갔다. 기원전 47~46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도 동행했다. 기원전 45년 [[독재관]] 카이사르의 지시에 따라 히스파니아 총독을 잠시 맡았으며, 에풀롱네스(epulones: 축제와 경기 때 잔치와 공개 연회를 마련하는 사제 직급)에 소속되었다. 이후 기원전 43년 갈리아 코마타[* 일명 장발의 갈리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끝내면서 설치된 임시 속주로 후에 아퀴타니아, 벨기카, 루그두넨시스로 분할된다.] 총독으로 예정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로마에 있었다. 그는 3월 17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에 이어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파'와 '카이사르파'간의 화합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원로원은 이에 보답해 그를 기원전 43년 갈리아 코마타 총독에 예정대로 선임했다. 플란쿠스는 갈리아 코마타 총독으로서 3개 군단을 이끌어 라에티아 원정을 이끌고 [[임페라토르]] 칭호를 병사들에게 받았으며, 루그두눔(리옹), 아우구스타 라우리카(오늘날 스위스 어구스트)를 건설했다. 기원전 43년 초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현직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로부터 탈취하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이를 막으려는 원로원이 충돌하면서 [[무티나 내전]]이 발발했다. 이때 키케로는 그에게 접근하여 안토니우스를 토벌하는데 힘을 실어줄 것을 요청했고, 플란쿠스는 원로원의 대의에 공감한다고 밝히며 자신이 이끌고 있는 병력을 안토니우스 토벌에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후방을 위협한다는 핑계를 대고 관망하기만 하다가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갈리아에서 연합하자 한동안 망설이다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중재를 받아들여 안토니우스-레피두스 편에 섰다. 그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폴리오와 함께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옥타비아누스가 이들과 접촉하여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이후 로마로 입성한 삼두가 대숙청을 단행했을 때, 그의 친척 몇 명이 명단에 올랐으나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고, 티볼리 시에서 가족과 경쟁하는 몇몇 사람을 숙청자 명단에 올리도록 했다. 기원전 42년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고, [[필리피 전투]] 기간 동안 안토니우스의 또다른 지지자인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와 함께 서방의 로마 영토를 통제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참전 용사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위원회를 결성했을 때 참여했다. 기원전 4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시아 내전]]을 단행했을 때, 폴리오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와 함께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진군해 옥타비아누스와 합류하는 걸 저지하고자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세 장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동생 루키우스의 내전 유발에 동의했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안토니우스의 명시적인 지시 없이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하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페루시아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루키우스는 조금만 더 버티면 바수스, 플란쿠스, 폴리오가 도와주러 올 것이며 형 마르쿠스도 동방에서 구원하러 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세 장수는 페루시아에 포위된 루키우스를 도와주길 주저했다. 그들은 마르쿠스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했기에 그가 이번 내전을 원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게다가 세 장수 중 누가 최고 지휘권을 맡는지도 문제였다. 폴리오는 군사 경력이 일천한 서생 취급을 받았고, 플란쿠스는 천박한 인성을 갖췄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벤티디우스는 과거에 노새를 닦던 노예라는 비방을 받았다. 마르쿠스의 절친한 친구 마니우스가 세 장수에게 "마르쿠스는 분명 동생을 구하고 싶어할 테니 어서 도와달라"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보다못한 풀비아가 벤티디우스와 폴리오에게 보다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고 강하게 요구하자, 두 장수는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페루시아로 진군했다. 이에 아그리파는 살비디에누스에게 페루시아 요새를 계속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폴리오와 벤티디우스를 물리치려 했다. 이에 폴리오는 라벤나로 이동했고, 벤티디우스는 리미니로 후퇴했다. 이후 풀리오와 벤티디우스는 플란쿠스 휘하 병력과 합세한 뒤, 페루시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페루시아에서 20마일도 채 되지 않은 풀기니움에서 아그리파에게 저지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벤티디우스와 폴리오는 즉시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플란쿠스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사이, 갈리아에서 11개 군단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칼레누스가 이탈리아로 남하하려고 군대를 소집했다가 돌연 병사했다. 그의 아들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휘하 병력을 고스란히 넘겼다. 이리하여 병력을 급속도로 불린 옥타비아누스가 페루시아에 원군을 대거 파견하자, 플란쿠스, 벤티디우스, 폴리오는 페루시아를 운명에 맡기고 마르쿠스가 올 때까지 버티고자 아드리아 해로 후퇴해 식량 창고를 건설하고 마르쿠스가 상륙할 지점을 확보했다. 이후 루키우스를 돕고자 식량 운송 부대를 한 차례 보내봤지만, 아그리파와 살비디에누스가 분견대로 가로막자 도로 후퇴했다. 결국 루키우스는 기원전 40년 2월 말 또는 3월 초에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보내졌다. 이후 브룬디시움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도착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갔지만 냉대받았고, 고대 문헌은 그에게 루키우스를 구하지 않은 '겁쟁이' 또는 '배신자'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다만 현대 역사가들은 플란쿠스가 섣불리 내전을 단행하기 보다는 안토니우스의 지침을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보고 신중을 기했을 뿐, 옥타비아누스와 싸우길 주저하거나 루키우스를 저버린 건 아니었다고 본다. 기원전 40년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으나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파르티아군이 아시아로 쳐들어오자]] 곧바로 도망쳤다. 이후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참여하여 파르티아와의 전투에 참전했다. 아시아에는 기원전 39년까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며, 후임자는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기원전 36년 집정관)|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안토니우스를 따라 이집트로 가서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한 번의 식사로 많은 돈을 쓰는 대결을 벌일 때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귀걸이에 달린 큰 진주를 식초에 넣고 삼키고, 뒤이어 또다른 귀걸이에 달린 진주를 녹이려 하자 즉시 멈추게 하고 그녀의 승리를 선언했다. 기원전 38년 안토니우스가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그는 시리아 총독을 맡아 후방 지원을 수행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조카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함께 편을 바꾸기로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두 사람이 클레오파트라의 초대에 불응했다가 눈밖에 났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위세가 약해진 걸 보고 대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울었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안토니우스의 다른 지지자들과도 마찰을 빛곤 했으며, 시리아 총독을 맡고 있을 때 불법행위를 저지른 게 안토니우스에게 발각될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은 로마로 이동한 뒤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가 발표한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유언서를 화로의 여신을 숭배하는 사제 처녀들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밀고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신성모독죄를 무릅쓰고 이를 탈취해 선동의 도구로 이용했다. "내가 죽으면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유서가 진짜인지 위조된 것인지 여부는 오래도록 논란이 이어졌다. 로마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로널드 사임 교수는 이 유언서가 진본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로버트 존슨 등은 유언서가 진본이라고 주장했으며, 현재 역사학계는 유언서가 진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유언장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안토니우스를 회복 불가능한 궁지로 내몰았다. 이 유언서는 옥타비아누스 진영이 그간 소문으로만 퍼뜨렸던 온갖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의 구실을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광범위한 정치조직을 동원하여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의 동의 없이 로마의 속국들을 불법적으로 분할했다는 주장, 정실부인인 [[소 옥타비아]]를 내쫓고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는 주장, 카이사르의 적장자로 [[카이사리온]]을 지명했다는 주장,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히고 싶어한다는 주장 등을 유포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이에 안토니우스를 마녀의 유혹에 빠진 얼간이로 여기게 되었고, 이제까지 옥타비어스의 정치적 야욕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중립적인 인사들까지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로마인들의 지지를 상실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패망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로마로 귀환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체택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또한 고위급 사제를 맡아 사투르네아 신전 복원에 관여했으며, 기원전 22년에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감찰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임기는 재앙 수준이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파울루스가 능력 부족이었다면 플란쿠스는 소심해서 감찰관의 직무인 규탄과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의견이 자주 충돌했기에 임기가 대실패로 끝나고 명예가 떨어졌다고 한다. 기원전 15년 가에타에서 사망했다. 플란쿠스는 생전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는 서기 13년 집정관을 역임하였으며, 14년 라인 군단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한 [[게르마니쿠스]]를 도왔다. 딸 무나티아 플란키아는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결혼하여 두 아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낳았다. 그녀는 훗날 남편과 함께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 당시에는 사면되었지만, 서기 34년에 다시 기소되자 자살했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오명을 산 아버지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로 개명했고, 서기 39년 아프리카 총독이 되었다. == 여담 == [[파일:플란쿠스 영묘.jpg]] 고대 로마의 인물들 중 매우 드물게도, 그의 무덤은 현존한다. 시신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이탈리아 가에타에 있는 무덤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무덤 양식은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유사하며, 에트루리아와 헬레니즘의 영향을 뚜렷하게 받았다. 이 무덤에는 그의 생애를 요약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졌다. >l . mvnativs . l . f . l . n . l . pron >plancvs . cos . cens . imp . iter . vii . vir >epvlon . trivmp . ex . rætis . ædem . satvrni >fecit . de manibis . agros . divisit . in . italia >beneventi . in gallia . colonias . dedvxit >lvgvdvnvm . et . ravricam > >루키우스 무타니우스, 루키우스의 아들, 루키우스의 손자, 루키우스의 증손자, 플란쿠스 >집정관, 검열관, 두번째 임페라토르 >에블론 사제 계급의 셉템비르(septemvir)이며 라이티아의 승리자 >전쟁의 전리품으로부터 사투르네아 신전을 복원하였으며, >갈리아에 루그두눔과 라우리카 식민도시를 건설하였고, >베네벤툼에서 이탈리아 토지를 분배했다. [[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제국 감찰관]][[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갈리아 속주 총독(로마 공화국)]][[분류:아시아 속주 총독(로마 공화국)]][[분류:시리아 속주 총독(로마 공화국)]][[분류: 기원전 87년 출생]][[분류: 기원전 15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