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노벨물리학상 역대 국가별 수상자)] ||<-2> '''[[왕립학회|{{{#white FRS}}}]][* '''F'''ellow of the '''R'''oyal '''S'''ociety[br]왕립학회 회원.][br]{{{+1 루이 드 브로이}}}[br]Louis de Brogli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Louis_Victor_Pierre_Raymond,_Duc_de_Broglie._Photograph_by_H_Wellcome_V0028118.jpg|width=100%]]}}} || || '''본명''' ||루이 빅토르 피에르 레몽 드 브로이[br]Louis Victor Pierre Raymond de Broglie|| || '''작위''' ||제7대 브로이 [[공작(작위)|공작]][br]7e duc de Broglie | 7th Duc de Broglie||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2> '''출생''' ||[[1892년]] [[8월 15일]]|| ||[[프랑스 제3공화국]] 디에프|| ||<|2> '''사망''' ||[[1987년]] [[3월 19일]] (향년 94세)|| ||[[프랑스]] 루브시엔느|| || '''직업''' ||[[물리학자]]|| || '''학력''' ||[[파리 대학교]] {{{-2 ([[학사]] / [[박사]])}}}[* 역사학 학사 1910년, 과학 학사 1913년, 물리학 박사 1924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양자역학의 기초를 닦은 [[프랑스]]의 [[물리학자]]다. 1920년대 양자역학의 개척시대에 ‘[[물질파|드브로이 물질파]]’(파장= [[플랑크 상수]]/입자운동량)의 개념을 주창하였고, [[양자역학]]의 입자-파동 이중성 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제6대 브로이 공작인 형[* 형도 동생만큼 유명하진 않았으나 X선 회절 및 분광학 등의 연구에서 성과를 남겼으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장을 지냈다.]이 1960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제7대 브로이 공작이 된 귀족으로 현대의 과학자들 중에 가장 높은 세습 귀족의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본인이 혼인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어, 사후 공작 자리는 작은아버지의 증손(즉 6촌 조카손자) 빅토르프랑수아(1949~2012)에게 넘어갔다.] 당시 프랑스는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귀족 제도는 없었으나, 귀족 집안의 인사가 공식 석상에서 귀족 칭호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허용했었다. 이런 관례는 1975년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폐지하면서 사라진다. 1949년 새로운 국제 물리 연구소를 설립하여 개별 국가에서 하기 힘든 거대한 물리연구를 진행할 것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1954년 [[CERN]]이 설립되었다. == 물질파 이론 == [[제1차 세계 대전]] 중 [[물리학]]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고, 대전 후에 [[물리학자]]였던 형인 모리스 드 브로이 제 6대 브로이 [[공작(작위)|공작]](Maurice, 6e duc de Broglie)의 연구로 자극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 참고로 형인 모리스도 노벨상 후보에 몇 번이나 오른 출중한 물리학자였다. 1923년 [[물질파]]의 개념에 도달하고, 다음해에 '양자론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모든 입자는 자신의 운동량에 반비례하는 파장을 지닌 [[파동]]이라는 것으로, 쉽게 말해 물질=파동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물질이 갖는 파동으로서의 성질'의 의미는 아직 해석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며, 제일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에선 그 파동은 사실 '그 점에서의 물질의 발견 확률'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정도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존재 확률' 이 아니라 '발견 확률' 이라는 점이다. 존재 확률이라는 단어는 "입자 등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발견 확률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영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볼 수 있듯이 광자는 슬릿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 실험에서 [[빛]]이 입자의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이 개념을 역으로 생각하여 "입자도 파동의 성질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정 하에 출발하였다. 이 이론 덕분에 빛의 이중성뿐만이 아니라 물질의 이중성 역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양자역학]]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27년 데이비슨과 거머가 [[니켈]]의 결정을 이용해 행한 전자 선속의 회절 실험으로 [[전자]]에 의해 생성된 간섭 무늬 관찰을 통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드 브로이는 1929년 파동역학의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논문은 [[소르본 대학]]의 박사 학위통과를 위한 '''학위 청구 논문'''이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는 과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던 내용이 매우 파격적이었고 분량도 짧아서[* 물질파를 유도해 보면 알겠지만, '''고등학생도 무리없이 따라올 수 있고 실제로 고등학생 교육과정에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간단한 컨셉이다.] 심사위원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고귀한 공작 가문 출신[* 당시 프랑스는 공화정이었음에도 구 귀족들의 칭호를 인정해주었다. 루이 드 브로이는 5대 브로이 공작, 빅토르 드 브로이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에펠 탑]]의 통신센터' 라는 상대적으로 안전이 보장된 지역에서 군복무를 했다. 물론 이런 인재를 전방으로 보내서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헨리 모즐리]] 꼴이 되게 했다면 인류에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의 논문을 퇴짜놓기 싫었던 심사위원들은 이 논문에 대해 귀족이고 뭐고 상관하지 않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인슈타인은 물질파 이론을 '물리학의 커다란 베일을 걷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고 하며, 이 답장을 받은 심사위원들은 "좋아, 누가 뭐라고 하면 아인슈타인이 지지했다고 하면 되겠네. 통과시키자." 라며 논문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즉, 이 사람은 '''박사학위도 따기 전에 노벨상을 받을 논문을 쓴 것이다'''. 사실 드 브로이는 이 물질파 이론을 뜬금없이 낸 것이 아니었다. 원래 그는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첫번째 학위도 역사 학위다. 그러나 실험물리학자였던 형 모리스 드 브로이의 영향을 받아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던 그는 형의 실험[* 귀족의 아들답게 파리에 있는 저택에 실험장비를 잘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에서 도출된 형의 견해, '[[X선]]은 사실 물질과 파동의 복합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전개해서 전자도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가질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낸 것이다. == 드 브로이 봄 해석 == 1927년 입자와 장을 나누어 설명하는 새로운 [[양자역학의 해석]]을 발견한다. 드 브로이는 [[솔베이 회의]]에서 자신의 해석을 발표하지만 [[볼프강 파울리]]의 거센 독설을 받는 등 회의에선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만다. 1927년의 솔베이 회의를 계기로 드 브로이는 자신의 이론을 버리고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게 된다. 1952년 [[데이비드 봄]]이 유사한 이론을 발표하고 1970년대가 되어 봄의 이론이 차츰 주목받기 시작하자 드 브로이 봄 해석의 지지자로 돌아선다. == 수상내역 == * 1929년 노벨물리학상 * 1932년 Albert I of Monaco Prize * 1938년 막스 플랑크 메달 * 194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 1952년 유네스코의 Kalinga 상 * 1953년 영국 왕립 학회 국외회원 [[분류:프랑스의 물리학자]][[분류:프랑스의 공작]][[분류:1892년 출생]][[분류:1987년 사망]][[분류:노벨물리학상 수상자]][[분류:센마리팀 출신 인물]][[분류:파리 대학교 출신]]